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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의 갑장산(甲長山: 805.7m)
갑장산은 상주(尙州)란 이름을 사용한 1,500여 년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상주의 주산(主山)으로, 일명 연악산(淵嶽山)이라고도 부른다.갑장산이 달려 온 길은 백두대간(상주구간: 69.5km)이 상주에 들어와 문장대를 솟구치고, 드디어 최고봉 속리산 천왕봉(天王峰: 1,058m)을 꽃 피우고, 이어 화령재에서 겸허하게 그 몸을 급격히 낮추어 비산비야(非山非野) 하더니, 마침내 공성의 웅이산(熊耳山: 763m)을 낳는다. 여기에서 김천의 황악산으로 내달리기 전 東으로 가지를 쳐 여남재를 가로질러 힘차게 백운산을 일으키고, 다시 北으로 방향을 틀어 산태백이재에서 잠시 주춤 하더니, 기양산(岐陽山: 706.8m)을 잉태하고 조산(祖山)인 수선산(修善山: 683.6m)을 낳고, 다시 돌티에서 잠시 쉬는 듯 하더니 마침내 비경(秘境)인 상주의 안산(案山) 갑장산을 수 놓는다.갑장산은 상주(尙州)란 이름을 사용한 1,500여 년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상주의 주산(主山)으로, 일명 연악산(淵嶽山)이라고도 부른다. 노음산(露嶽山: 728.5m), 천봉산(石嶽山: 435.8m)과 함께 상산(商山) 삼악(三嶽) 중의 하나로 아름답고 가장 높으며 백질바위, 상사바위, 촛대바위, 문바위, 바람문, 두근두근길, 약수터 등이 있으며, 그 이름은 신라 고찰 갑장사에서 유래 하였다는 설과 고려조 충렬왕이 지었다는 얘기(舊堂 趙沐洙의 甲長勝遊錄)가 전한다.상산지에는 “주(州)의 남방 13리허에 있으니 일명 연악이라 한다. 첩첩(疊疊) 봉만(峯巒)이 용취(聳翠)하여 동서헌(軒)의 궤석간(几席間)을 상대 하고 있으며, 산수가 서쪽으로 지천(智川)이 되어 석천의 절승을 이루고 그 아래에 연악서당이 있으며, 조금 동쪽에 고봉서당이 있고 그 남방에 수선산이 있으며 그 산하에 서당이 있으니 이 모두 목사 신(申)영천자(靈川子) 잠(潛)이 지은 것이고, 연악과 수선은 신목사가 당액(堂額)을 손수 쓴 것이다, 산의 정상에 구룡연(九龍淵)이 있으며 관가가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라고 적고 있다.이러하듯 갑장산은 우리 가까이서 늘 함께 하고 있는데, 지역의 명문 상주고등학교를 비롯하여 여러 초·중등학교의 교가(校歌)에서도 갑장산의 정기를 쉽게 접할 수가 있으며, 현재도 이 산을 중심으로 갑장·용흥사와 연악서원 그리고 낙동면의 양진·오작당,용산정사,의암고택,장천서원,청간정,옥류정,유곡리3층석탑,보현사..... 많은 값진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갑장산 동쪽 자락 아래로 낙동면의 비룡·용포리의 지명을 보면 아마도 갑장산을 용(龍)에 비유한 듯하다. 이 산은 西에서 보면 순한 듯 보이지만 東에서 올려다 보면 지극히 악산(嶽山)이요, 北에서 보면 문필봉(文筆峰) 말 그대로 붓 끝을 세운 듯하다.비록 1,000m대의 낮은 산에 속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조망 또한 가히 압권(壓卷)이라 산을 아는 이는 다시 한번 놀란다.우리의 자랑 낙동강의 최상류에 설치된 상주·낙단보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가까이 있는 산들은 차치하고, 北으로 저 멀리 소백·학가·일월산이, 東으로는 선암·보현·팔공·비슬산이, 南으로 가야·덕유·황악산이, 西로는 운장·서대·속리산까지 조망이 된다고 하니 어찌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소산(素山) 김홍주 선생은 “조망의 즐거움”에서 상주의 갑장산에 대하여 전혀 짐작하지 못한 행운이라고 말했다.최근 굴티를 동서로 넘는 상주~청원간 고속도로와 남북을 잇는 3호 국도4차선등 사통팔달 뚫린 교통여건에 힘입어 주말에는 외지에서 관광차 몇 대씩이 갑장산을 다녀간다. 지천의 솔 내음이 좋은 갑장산 진입로변과 등산로, 먹거리촌등에 예쁜 옷을 입혀 청정한 상주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가꾸고 살려야 하며, 또한 상주인 누구나 너나 할 것 없이 갑장산에 오르면 『상주 알리미』가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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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용포의 충열각(忠烈閣)
상주 용포의 충열각(忠烈閣)백두대간「여남지맥」의 수선산에서 돌티를 지나 상주의 진산 갑장산(甲長山:806m)을 빗었는데 이 산에서 동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 아래 전형적인 아담한 촌락이 있으니 상주시 낙동면 용포리(용담)이다.이 마을 어귀에 고목의 느티나무와 함께 한 칸의 맞배기와지붕이 있으니「충열각忠烈閣」으로 낙동면 수선로 767입니다.도로 가에 높게 쌓은 석축 위에 시멘트 블록으로 방형으로 담장을 쌓았고, 남향으로 단칸 규모의 각(閣)을 세웠는데, 건물은 기단 없이 원형주좌를 가진 가공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올렸고, 앞면에만 살대를 세웠는데 세월의 무게에 무너지고 있네요. 내부 뒤쪽에는 가느다란 원기둥을 세워(忠臣通政大夫兵曹參議李彦眞之門崇禎紀元後四癸丑三月命施)’라 쓴 정려판(旌閭板)이 걸려 있으며, 가구는 간략한 3량가(三樑家)이고, 골기와를 올려 단아하고 엄숙한 매무새인데 이제 많이 낡아 있지요.이언진(?~1637)은 조선중기 무신으로 慶州人이고, 號는 용담(龍潭)으로, 父는 백(舶)이요, 母는 안동권씨이다. 公은 관(官)의 수문장(守門將)으로 1636년 병자호란시 창의하여, 쌍령전투(현 경기도 광주: 1637. 1)에서 순국(殉國)하였다 한다. 그 후 사림(士林)에서 公의 충절을 조정에 알려 1853년 병조참의로 증직되고, 이곳에 충열각을 세운 것이다.상산지 충절 편에는「경주인이며 관 수문장이었다. 병자란 때 창의하여 쌍령에서 대적하니 세부득하여 아군이 패산하게 되자 그는 높이서서 활을 쏘아 토적하며 매적하고 굴함이 없이 끝까지 싸우다가 순국하니 호적도 감탄하여 이 사람이야말로 동국에 진남자라 극찬하였다. 장사 때 한줄기의 백기가 혼백을 따라 3일간이나 뻗쳐 있었다. 사림에서 상천하여 병조참의가 증직되었고 자손과 향인들이 용담리에 충열각을 세우고 춘추로 정일에 향사하며 자손이 그의 향리에 거주하고 있다. 李彦眞慶州人官守門將丙子亂倡義赴雙嶺軍皆逃散彦眞屹立發矢罵賊不屈竟死之賊相謂曰此眞東國偉男子葬時一段白氣隨魂長亘三日不滅士林上言 贈兵曹參議子孫立忠烈閣于龍潭里春秋丁享子孫因居其里」라 적고 있어 이는 상주의 자랑입니다.충신각 맞은편 산록에 公의 형제분을 모시고 있는 충의사(忠毅祠: 용포리596)와 그 옆에 3칸 팔작기와지붕의 추모재(追慕齋)가 1853년 동시에 창건되어 있습니다.용포리 용담마을은 경주이씨 집성촌으로 "이암공파" 이관(李琯)의 후손인 公의 형님 이언홍(李彦弘)公이 입향조로서, 임난 후 이곳에 정착하여 “彦弘公派”를 형성하여 현재도 50여호가 세거하고 있습니다.용담마을의 유래는 이언진 장군의 號(호)를 따서 “용담”이라 했다고 하는데, 이 보다 앞서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용담사(龍潭寺)에서 머물다가 간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과용담사(過龍潭寺) 시(詩)에 이미 용담이란 명칭이 있어 고개를 갸우뚱 하게 합니다(참고: 상산지. 이락지천 낙동)
201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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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승곡리 청간정(聽澗亭)
상주에서 남천교를 지나 상선로를 따라 굴티를 넘어서는데, 이 주째 계속되는 폭염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여기서 부터 낙동면 운평리이다.내리막길을 다 내려가서 면사무소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여 조금 더 진행하면 운곡(雲谷)마을(갈가실) 이정표를 만난다. 이곳에서 북으로 들어가면 뒤쪽으로 높다랗게 국사봉이 보이고, 아침마다 마을 양편으로 흐르는 개울 골짜기에 안개가 자욱하다 하여, 또는 서운(瑞雲)이 감돈다고 하여 운곡 이라 했고, 이 마을 뒷산에 칡이 무성하다 하여 갈가실 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안길 오른편으로는 고가옥(古家屋)과 돌담장이 눈에 들어오는데,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아주 조용한 마을이다. 곧장 나지막한 경사면을 나의 애마가 힘차게 오르니, 고와가(古瓦家) 한 채를 만나는데 이곳이 청간정(聽澗亭)이네요.안내문에는 「가곡(柯谷) 조예(趙秇1608~1661)가 1650년경 건축한 건물이다. 조예의 아들인 죽파(竹坡) 조원윤(趙元胤1633~1688)과 용슬헌(容膝軒) 조진윤(趙振胤1635~1709)형제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제자로서 미수로부터 청간정의 현판을 받아 들보에 걸었다...」라 안내하고 있으며, 죽파(竹坡)는 상주객사의 이건(移建) 구기(舊基) 상량문(上樑文)을 찬(撰)하기도 하였답니다.상산지에 「聽澗亭 在州南雲谷司勇趙秇所築(補)壇上杏樹雙翠庭前石泉 鳴司藝曹挺融題詩且有揭板 청간정 주남 운곡에 사용 조예가 세웠으니, 단상에 은행이 쌍취하고, 정전에 석천이 장명하며, 사예 조정융이 시를 쓰고, 현판을 걸었다」라 적고 있다.이 亭은 남향으로 갑장산을 바라보고 있지요, 바로 앞에는 국사봉 계곡에서 사시사철 흘러내리는 물이 정자와 아주 어울리는데요, 따라서 강계연변형(江溪沿邊形)이지요. 기와를 얹은 토석담장을 두르고, 전면 3칸, 측면 1.5칸의 팔작 기와지붕입니다. 정면에 맞배 기와지붕의 사주문(四柱門)으로 대문을 배치했지요, 건물은 반중층 누각형식으로 경사진 면을 적절히 이용을 한 것 같아 보입니다. 왼쪽은 전체가 대청마루이고, 오른쪽 2칸은 방인데,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으며 계자난간을 둘렀지요. 아래층에는 온돌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를 설치하였으며, 가운데 기둥 2개는 사각기둥이고, 양가에는 원기둥을 세웠네요. 우물마루를 놓은 대청은 서북쪽에 판벽으로 설치를 했는데, 칸마다 쌍여닫이문을 달아 아주 맛깔스럽고 운치가 있어서 좋아요. 대청마루와 툇마루, 방으로는 오르기 쉽도록 디딤돌을 놓았습니다. 아궁이 앞마당에는 널따란 큰 자연석이 박혀 있는데, 앉아 쉬기도 편할 것 같아요.이 亭은 풍양조씨 호군공파 검간공 자손들의 학문의 장소이고, 영남유림의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열던 장소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청간정에는 오른쪽 방위에는 청간정(廳澗亭)이, 대청마루 위에는 익암서당(益巖書堂)의 편액이 안쪽을 지키고, 건물 정면에는 「조씨가숙(趙氏家塾)」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문외한이 읽기에는 너무 벅찬 글이네요. 청간정과 익암서당의 편액은 미수(眉叟)의 친필이라 전하여지고 있다. 이 亭은 17세기 후반에 세워졌고, 19세기 후반에 중수된 것으로 조선 중기 정자건물의 특성을 갖추고 있으며, 건립당시의 규모와 구성형식이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어서 조선시대 정자건축 연구의 자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한다.대청마루 벽에 걸린 ‘제청간정(題聽澗亭)’을 올려보면聽澗亭中聽澗聲 청간정에서 개울물 소리 들으니襟靈瀟洒十分淸 가슴이 시원히 씻겨 맑기만 하네.窓欞几格無塵色 창살이며 책상에는 티끌 한 점 없고巖壑林巒不俗淸 바위 계곡 우거진 산 속정이 아닐세.興至輒成詩一首 흥 일면 문득 시 한 수 짓고客來常供酒三行 손 오면 늘 삼 배 술 나눈다네.娛心瀉玉玲瓏響 즐거운 마음 구슬같이 영롱히 읊는 소린絶勝佳人錦瑟鳴 가인의 가야금 소리보다 한결 낫다네.己酉 初秋 湖翁 이다.호옹(湖翁)은 조정융(曺挺融)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유첨(維瞻), 호는 호옹(湖翁)이고, 아버지는 우인(友仁)이시다.청간정의 왼쪽 단위에는 500여년 된 두 그루의 은행나무(상주시 보호수: 1982.10.26지정)가 있어 정자의 멋을 살리고 있지요. 또한 이 마을 뒤쪽에서 발견된 ‘구상화강암’은 천연기념물로 보호를 받고 있으며, 한 가운데 자리한 ‘의암고택’ 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어 마을 한 바퀴를 돌아보면 많은 것을 느낄 수가 있어 좋은 곳이지요.청간정문화재명 : 상주 승곡리 청간정(聽澗亭)주 소 :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214-3번지지 정 :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558호(2009.10.12)
201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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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단보
[개설]낙단보는 총 사업비 13조 9000억 원을 투입해 2009년부터 시작된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에 조성된 8개 보[수리 시설의 하나로 둑을 쌓아 흐르는 냇물을 막고 그 물을 담아 두는 곳] 중 상류 2번째에 위치한 보이다.[변천]낙동강 살리기 사업 제32공구[구미·상주·의성] 사업의 하나로 2009년 11월 23일 국토 해양부 고시 제2009-1117호에 따라 건립 공사가 시작되었다. 낙단보의 경관은 ‘자연은 이롭게, 사람들은 즐거운, 생명이 유익한 생태 환경 조성’이라는 주제의 ‘이락지천(利樂之天)’을 콘셉트로 설계되었다. 외형은 낙동강 3대 정자 중 하나인 관수루(觀水樓)의 처마를 모방하여 경상북도 의성군,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북도 구미시 세 지역의 자연과 역사, 문화가 융합되고 사람이 어우러지는 전통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도록 했다.한편, 2010년 10월 14일 발파 공사 중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낙단보 전망대 건립 예정지 자리에서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 보살 좌상이 발견됨으로써 공사가 일시 중단되었다가 마애보살 좌상을 보존하기 위해 설계가 변경되었다. 2011년 2월 16일 전력 제어실과 문화관을 준공했으며, 2011년 11월 12일 오후 1시 개방 축제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일반에 공개되었다.[구성]총 연장 286m[고정보 144.4m, 가동보 141.6m], 높이 11.5m, 저수 용량 3,430만 톤의 친환경 다기능 보로 조성되어 있다. 1,500㎾급의 소 수력 발전소 2기가 설치되어 연간 1,472만㎾h의 전기를 생산한다. 이외에 연장 141.6m 규모의 공도교, 자연형 수로와 콘크리트 블록 조립형인 아이스 하버식[Ice Harbor, Fishway]이 복합적으로 적용된 어도가 설치되어 있다.[현황]마애 보살 좌상은 전략 제어실과 문화관 사이 나무 계단 아래에 보존되어 있다. 낙단보 주변에는 낙동강 야생화 테마 숲과 생태 축 조성, 역사 문화 테마 파크 조성 사업 등이 추진 중이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1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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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산(螺角山)" 출렁다리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나각산(螺角山)입니다2010년 7월 준공한 낙동강 생태탐방로 구간중 "나각산(螺角山)" 출렁다리 입니다, 나각산 정상(해발 240m)에서는 낙동면 동부지역 7개리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으며, 또한 동쪽으로 낙동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어 뺴어난 경관을 자랑하고있습니다.
201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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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옥 선생 추모비
신현옥선생 순직비제자를 위해 목숨을 던진 신현옥 선생 추모비이다. 상주시 낙동면 낙동초등학교 정문 앞에 2기의 순직(殉職)을 알리는 비(碑)가 서있으니, 상촌리 704번지이다.공(公)은 일제강점기 낙동국민학교 교사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이 비는 제자를 위해 목숨을 던진 신현옥 선생 추모비이다.원래는 낙동초등학교 뒤 잿미산에 있던 것을 1979년 9월 학교 정문 앞으로 옮겨 세웠다. 이 비석에 대한 내력을 살펴보면, 1950. 6.25 전쟁 시 탄흔의 흔적이 지금까지 여러 곳에 남아 있는 한 기의 비에는 소화 17년 8월 20일 낙동공립보통학교 보호자회에서 세운 비석으로 「殉職平山申鉉玉之墓(순직평산신현옥지묘)」라고 새겨져 있고, 다른 한 기에는 1979년 9월 낙동초등학교 해방10회 동창생 일동이 세운 비석으로 「故平山申鉉玉先生殉職碑(고평산신현옥선생순직비)」라고 새겨져 있다.선생께서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낙동초등학교 2학년 1반 담임으로 재직 중 그해(庚辰年) 8월20일 학교로부터 약 4km 떨어진 낙동강 중류지역 중동면 죽암리 도선장(대바위) 나루터에서 체력단련 물놀이를 하던 중 김00 이란 학생이 안전지역을 벗어나 수영을 하다가 급류에 휩쓸려 강물에 빠지게 되었다. 동료학생들이 그를 구하려고 애태우고 있을 때 선생께서는 제자를 구하려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으나 그 제자는 선생의 몸을 부둥켜 안은 채 놓지 않아 사제지간(師弟之間)은 살아나오지 못하고 낙동강 물길 속으로 떠내려 보낸 사건이다.제자를 위해 목숨을 던진 스승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학교 뒷산에 추모비를 세우고, 매월 팔월 스무날(20일) 전교생들은 아침 조회 때 선생의 추모비를 참배하며 아!! 때는경진년 팔월 스무날낙동강 대바위 나들이에서가엾은 어린 목숨 건지려다가가셨도다 영원히 신현옥 선생..... 이라는해방 후 이홍영(李洪寧) 교장선생께서 작사한 추모의 노래를 부르며, 가신 스승을 애도하고, 높은 뜻을 가슴에 새겼다.(利樂之川 洛東) 라고 전한다. 낙동초등학교는 내곡리에 소재 하는바 상촌리와는 경계를 하고 있다. 낙동면사무소와 낙동새마을금고 사이의 도로를 지나 내곡리로 들어서는 초입의 낙동초등학교 정문 바로 앞 오른편에 서 있으며 5월은 가정의 달(어린이· 입양· 어버이· 스승· 가정· 성년의 날)이라, 스승의 순직비는 흔치않은 것으로 다시 한번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 낙동강 상류 중동면 죽암리 도선장(대바위) 나루터에서 어린 목숨을 구하려다가 及其也 水中孤魂이 된 한 청년교사 있었으니 그가 바로 純潔한 인간애로 불타오른 故 平山申公 鉉玉先生이다. 선생은 일찍 大邱師範學校를 卒業하고 初任으로 洛東公立普通學校에 赴任하여 擔當 學級인 二學年 一班生 들을 引率하고 상기 장소에서 夏季鍛鍊이란 훈련을 實施하던 중 한 아이가 물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것을 보자 蹶然이 뛰어들어 성지에 순직하였으니 아! 슬프도다 때는 1940년 庚辰 8월 20일 鵬程萬里에 푸른물을 실은 꽃다운 청춘이 哀惜하도다 壯哉라 이는 오로지 弟子를 사랑하는 훌륭한 敎師像을 올바르게 浮刻시켜 후세에 龜鑑이 되었다. 이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崇仰心이 이루어 지는 것이라 하겠다. 당시 학교장(日本人)이 중심이 되어 학부형보호회에서 선생의 교육정신을 찬양하기 위하여 학교 뒷산에 순직비를 건립하였다. 조국이 해방된 뒤 다시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가신 그날이 오면 매월 비석앞에 전교생이 모여 고신현옥선생 추도가 李洪寧 교장선생의 作詞를 합창하면서 선생의 넋을 조상해 왔었다. 오늘에 있어 英靈에 대한 정성이 소원(疎遠)함도 있는 듯 그리고 또 건립된 장소가 뒷산 등성이 외딴데 있을 뿐더러 비문 마져 일본말로 되어있어 후세에 남김이 심히 유감으로 생각되어 해방후 본교 10회 동창생 일동이 丹誠을 모아 모교 정문앞에 이 비를 세우고 선생의 그 숭고한 정신을 새겨서 永劫에 전하게 하노라 서기 1979년 9월 하순낙운중학교장 金演權 撰書낙동초등학교 해방후 10회 동창생 일동 건립조성태, 정정일, 전주상, 김태재, 조성길, 이상옥,황인갑, 조중연, 김진수, 김인목, 김연주, 김홍규, 노인호, 이상국, 김정호, 김상소, 조정수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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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나루(낙단교준공기념탑)
[기념탑앞면]여기 푸른 물결이 굽이쳐 흐르는 칠백리 물길 낙동 나루터에 우리의 오랜 염원이요 겨레의 동맥인 낙단교가 완공되었습니다. 이로써 상주시 군과 의성군간의 오랫동안 불편했던 뱃길이 육로로 이어짐으로써 상주의 번영이 이 길과 강물따라 줄기차게 뻗어 나갈 것을 믿으면서 그 준공을 기념합니다. 1986년 월 일 상주시 군민 모두의 힘을 합하여 낙동강나루 (기념탑 뒷면) 뱃노래 흥겨운 물결 길손도 머문자리 삿대질 긴 시름이 산 노을로 타는 옛터 낙단교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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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윤(金顯潤) 효자비
낙동면 물량리 64번지에 김 현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효자비가 있다. 효자 현윤은 고가락 태왕의 후예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했다. 9세 때 아버지가 돌아갔다. 초종 장례와 대소 상례를 어른처럼 치루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교훈을 잘 지켰으며 40여 년간을 어머니를 받드는데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과 모든 행실 범절이 보통 사람과 달랐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시묘 3년에 효도를 다했다 한다.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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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 각김일 따님의 효녀각
김일 따님의 효녀각은 낙동면 내곡리에 위치하고 백 여 년의 풍마우세를 겪어오면서도 그 찬란한 단청과 새겨진 글발은 자라나는 오늘의 후세들로도 날로 보매 한층 효심을 일개워 주곤 한다. 임진왜란으로 상주성이 함락되자 김 일은 향리의 병졸 5백 여명을 모아 북계(지금 상주시 후천교 일대)전쟁터에서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힘이 다해 전사했다. 낙애집에 의하면 당시 김일의 따님은 방년 17세의 연약한 처녀의 몸으로 아버지의 전사하신 소식을 듣고 어머님과 함께 몸종을 앞세우고 망곡애통하여 울부짖으면서 전쟁터에 당도하니 적병과 아병들의 전사로 유혈성천이요 적시여산이라 문자 그대로 처참한 광경에 돌입하여 시체를 샅샅이 뒤적거리며 가까스로 3일만에 아버지의 시체를 찾아내자 졸지에 적병들이뛰어들어 어머님을 위협했다. 어머니는 준엄한 말로 적병들을 꾸짖었지만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남은 생명은 처녀와 그의 몸종 영환이 뿐이었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처녀는 천애 고아가 되어 같이 죽자하니 부모님의 시체 수습이 막중한지라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시체는 몸종 영환에게 업어 모시게 하고 피눈물을 닦으면서 30여 리의 밤길을 걸어 고향인 장천(지금 낙동면 화산리) 옥산 뒷산에 안장하니 여기가 곧 조선의사 김 일의 무덤이다. 왜란이 평정된 뒤 이 사실을 나라에서 알고 김 일에게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를 추증하고 충의단에 입향했고, 그의 딸은 효녀로서 출생지에 효녀각을 짓게 했다. 김 효녀는 김일과 그의 부인 장씨 사이에 무남독녀로 태어나서 출천의 효녀로 자라날 때 부모님의 곁을 떠날 줄 모르고 지성으로 봉양했다. 더욱 당시의 남존여비의 철칙 같은 사상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을 때였건만 동리 사람들은 입을 모아 효녀 심청재생이라 칭찬이 자자하였다 한다. 또한 부모님의 묘소 옆에 묘막을 짓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시묘 삼 년의 효심을 스스로 자청하였으나 여자의 시묘는 예법에 없다하여 집안 사람의 억제로 좌절되고 3년 상을 지난 후 감역 김 광윤에게 출가하여 말하기를 아버지의 대의정충은 맑은 하늘을 찌르고 우주에 닿았지만 불행하게도 아버지의 뒤를 이를 후손이 없으니 망극한 일이라 하였다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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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의사(조선의사) 전적비
김일의사(조선의사) 전적비 김일장군은 임진왜란때 상주북천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공을 많이 세우고 장렬히 전사한 뒤 상주 충의단에 입향된 의사이다.낙동면 화산2리 웃중리 마을 남쪽에 있다. 김일장군은 임진왜란때 상주북천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공을 많이 세우고 장렬히 전사한 뒤 상주 충의단에 입향된 의사이다. 비석은 상산김씨 문중의 대표인 김연권씨가 1978년 정부의 지원으로 김일의사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건립하였다. 상산김씨문중은 이비석앞에서 음력10월 초닷새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본 유적열 마을의 내곡리 그렁마마을에는 김일의사의 외동딸인 상산김씨의 효행을 기리는 효녀각이 세워져 있다. ≪ 김일은 1592년 4월 25일 상주성이 왜적에게 함락당하자 고향 장천의 화산에서 의병 수백명을 모아 상주성 탈환을 위해 싸우려 북천빗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 하셨다.≫ 참고 : 상주지명총람, 문창사, 조희열, 2002.12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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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곡리 삼층석탑
유곡리 3층석탑은 상주시 낙동면 유곡리 속칭 관터마을에 자리를 잡고 있다. 탑 주변은 옛 사지(寺址)였으나 현재는 논밭으로 변하여 사찰의 유물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이 석탑만이 서 있다. 석탑은 상.하 2층기단위에 탑신을 받치고 있는 방형의 일반형 3층 석탑으로 그 동안 논 가운데 기울어진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가 최근에 보수를 하여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석탑 기단부의 구조와면상 및 귀꽃문양의 조각, 옥개석의 조성수법과 탑신의 비율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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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정상산 사장사(商山四長寺,甲長勝長, 南長, 北長寺)
승장구곡에 옥류폭포와 옥류정상산(商山)의 삼악사장사(三岳四長寺)의 하나인 승장사(勝長寺)가 있었던 이곳은 상주의 진산 갑장산(806m) 정상에서 산줄기 하나가 바로 동으로 뻗어 내렸으며, 다른 하나는 상산(694m)에서 또 동으로 뻗어 내려 두 산 줄기를 이루니, 그 사이로 구룡연(九龍淵)에서 솟은 물줄기가 계곡을 이루니 골이 깊고 산수가 빼어난 곳이 많으며, 이어서 장천으로 들어가니 이름 하여 승장계곡이라 한다.조선 태종 때 부제학을 지낸 김상직(金尙直)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勝長寺重修記〉에서 “고려 충렬왕(재위1275~1308) 이 중국 조정의 명을 받아 上洛公 金方慶을 명하여 동으로 왜구를 정벌하는데, 왕이 金海府에 거동하여 전송하고, 거가(車駕)가 돌아올 때에 이 절에 유숙하고 드디어 天台宗에 붙이었다”라고 하였다. 신라시대에 창건한 승장사가 있었던 곳으로 충렬왕이 잠시 이곳에서 머물며 연악을 가리켜 “영남의 으뜸 산”『갑장산甲長山』이라고 감탄하였다는 설화가 있는 명소로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절승의 명사찰로 남았던 것을 알 수가 있다.이 계곡 중간쯤에 육칠리 거리의 바닥에 암반이 누워있어 물길이 이어지는 곳에 협곡과 폭포를 연이어 형성하고 있으니 승장폭포(일명:玉流瀑布)라 한다. 검간 조정(黔澗 趙靖:1555~1636)선생이 15세부터 이곳 암자에서 독서하며 호연지기를 길러 심신수련장을 삼은 유서 깊은 곳이 되었다.1620년경 검간 선생이 현 옥류정(玉流亭:낙동면 승곡1길 48-7) 자리에 터를 잡아 미투리에 지팡이를 짚고 수시로 오가며 소요음영(逍遙吟詠)한 곳으로 선현의 장구지소(杖屨之所)가 되었다. 그 후로 후손과 사림들은 추앙의 징표로 선생이 청운(靑雲)의 꿈을 펼치던 산사면에 입석처럼 생긴 바위에 「검간선생장구지소黔澗先生杖屨之所」라 크게 새겨 놓았네요.갑자년(1924년)에 승폭계(勝瀑稧)를 결성하여 옥류정을 지으려고 승폭수계완의(勝瀑修稧完議)를 거쳐 건축비 마련에 착수하였으며,그 뒤 임자년(1932년) 봄에 승장폭포의 한 명구에 옥류정을 세우려하자 도남단소(道南壇所)에서 유림에 검간 선생의 유업을 기리는 일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는 통문을 보내어 힘을 실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여러 과정을 거쳐 창건된 이 亭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팔작기와 지붕의 겹처마이네요. 중당협실형으로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고, 툇마루 양 끝에 출입용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러 정면에서 보면 누각 분위기를 살렸지요. 정면에 현판은 “玉流亭”이라 하였으며, 왼쪽에는 세심헌(洗心軒), 오른쪽에는 영귀실(詠歸室)이라 편액을 걸었네요. 세심헌 앞의 마루는 주변보다 약 20cm정도 높게 깔았으며, 천장역시 “우물천장”으로 마감을 한 것이 특이하네요.甲子年(1924년)에 조남호(趙南琥)의 승폭수계서(勝瀑修稧序)에는 「商之東南多名山水而九龍山爲最也兩支撗馳東來作勝溪峯回路轉谷幽崖阻行六七里間......」라 적고, 갑인년(1974년)에 김황(金榥)의 옥류정기(玉流亭記)에는 「尙州古稱 士大夫之名鄕 而其地北跨嶠嶺 東帶洛江 窲窱拱抱多 山林水石之勝 今此長川里 九龍山下 七曲灘上 有玉流一亭....」라 적고 있듯이 갑장산 서쪽에 연악구곡이 있다면 동쪽에는 승장구곡이 있는 천혜의 명승지이지요.검간 정신을 본받고 이어가고자 선현숭모의 아름다운 모임인 “승폭계회”가 해마다 열리고 있는데, 옥류정 옆에 새롭게 1997. 8 에 관리사를 신축하여 이용하고 있지요. 승곡리가 농촌체험휴양마을로 변하여 매 주말이나 휴가 때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옥류정을 비롯하여 검간 선생과 관련된 많은 유적들을 둘러보면서 선생의 학덕과 임난시 창의하여, 적을 막은 충성심 등을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이 되네요(참고: 옥류정, 상주의 누정대)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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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원당
추원당 추원당은 영조35년(1759년)에 목조와가로 최초 건립되었으며, 배치는 묘우, 강당내외삼문, 전사청, 고직사 등 전형적인 재사(齋舍)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이곳은 조선 선조, 인조때 학자인 정구 김성일의 제자였던 검간 조정선생의 불천위를모신 재사이다.이집은 기단없이 장초석을 세우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마루를 걸었다. 마루면의 높이는 그다지 높지 않지만 계자난간까지 가설해서 영낙없는 누각의 모습이다.뒷면은 단층 건물로 처리했다. 5X2.5칸이 규모로 전면 퇴칸은 복도와 같이 개방했고,툇마루 양끝으로 계단을 설치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장천서원의 모태는 검간(黔澗) 조정(趙靖, 1555~1636)선생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1742년에 건립한 경모사(景慕祠)와 1952년 인근에서 이건한 강당으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41호(2002.10.14)인 추원당(追遠堂)이다. 2007년 12월 지방 유림과 문중에서 옛 지명을 따라 ‘장천서원’으로 그 명(名)을 변경하고, 배향 선현은 만은(晩隱) 조윤녕(趙允寧, 1484~1536), 검간(黔澗) 조정(趙靖), 가규(可畦) 조익(趙翊, 1556~1613)으로 세분이다.아주 정성스럽게 쌓은 담장으로 둘려 있는데, 솟을삼문의 숙정문(肅靜門)을 들어서면 강당이다. 전정에 오랜 연륜을 짐작케 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길손을 반기는 가운데에 강당인 추원당은 그 현판을 ‘長川書院’으로 걸어 놓았다. 누마루에 정면 5칸, 측면 2.5칸으로 목조 팔작 기와지붕이다.루(樓)와 같은 느낌을 주는 고상식(高床式) 건물로 양쪽 끝에는 방을, 중앙의 3칸은 마루로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나, 여느 건물과는 다르게 가운데 마루에는 문을 달았다. 가운데 4폭에 팔각형 벌집 모양의 문살은 조금 작으며, 양옆에 3폭의 문살은 조금 크게 해 놓아 자연스럽게 안정감을 주는 배려의 기법을 엿볼 수가 있는데 걸쇠에 걸 수 있다. 전면에 퇴칸을 두고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출입은 좌우로 한다. 퇴칸 아래의 기둥은 석재로 사각기둥이고, 위에는 목재로 원기둥인 것도 특이한 모습이고, 돌로 쌓은 축은 아주 정갈하고 깔끔하다. 동재와 서재는 없으나 강당의 안쪽에 목재(睦齋)와 경재(敬齋)의 편액을 걸었다. 구조가 크고 안정감이 있어 강당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강당 뒤의 경사진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묘우인 경모사(景慕祠)이다. 목조 맞배 기와지붕으로 풍판을 달았으며, 가운데 문은 두 폭이고, 양옆에는 외문이다.제사는 밤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솔불을 올려놓을 수 있는 정료대(庭燎臺) 2기를 볼 수 있다.묘우 사방의 배롱나무는 그 모양새가 세월의 무게를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대단해 보인다. 문화재명 : 상주 승곡리 추원당(尙州 昇谷里 追遠堂)소 재 지 :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237번지지 정 :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141호(2002.10.14)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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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정사
상주의 진산(鎭山)인 갑장산 최고봉에서 동으로 한 줄기가 힘차게 뻗어 내려가니 530m峰이다. 이곳에서 북으로 자세를 급히 낮추어 통사동(通士洞)에 이른다. 다시 북으로 더 낮은 자세로 내려가다가 동으로 내려앉으니 언가방(言可坊)이다. 지방도903호선을 따라 상주에서 선산으로 향하다보면 승곡리 신기(새터)에서 ‘양진당400m’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이곳에서 양진당 쪽으로 조금 들어서면 작은 실개천을 만나는데, 이 천을 따라 올라가면 나지막한 야산이 삼면을 포근하게 감싸는 곳에 토석 담장으로 둘러싸고, 문간채와 정사를 남서향으로 한 용산정사를 만난다. 정사(精舍)는 조선시대 경제력이 있는 양반들이 공부하던 곳이나, 주로 정자(亭子)와 같은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하는데, 당호(堂號)는 와연당(臥淵堂)으로 걸었다. ‘용산(龍山)’이란 뜻은, 갑장산 구룡(九龍)의 한 줄기가 동으로 십여 리를 달려와 결지된 장소에서 연유하였다 하며, 와연당으로 한 것은 대청마루에 누워서 집 앞의 연못을 한가로이 감상할 수 있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위재(危齋) 조상덕(趙相悳)이 1849년(헌종9년) 이곳에 선조의 업을 잇고, 독서와 은거자적 하려는 뜻에서 건립하였다. 선조가 살던 집이 홍수로 살기 어렵게 되자 건물을 철거하며, 그 곳의 재목을 사용하여 정사를 짓고, 거처하였던 당을 와룡당(臥龍堂)이라 불렀다. 문간채 앞에 직사각형의 연못은 금년의 심한 가뭄 속에도 물이 가득하다. 정사의 출입문은 전면 3칸의 맞배 기와지붕으로, 맨 오른쪽이 출입문이며, 왼쪽으로 2칸은 온돌방이 시설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전면 4칸과 측면 1.5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반중층 누각형식이다. 주두와 주간(柱間)사이에는 소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민도리 양식이다. 정면 빈칸은 툇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계자난간대가 형성되어 있는 양반집의 구조로 19세기 이후의 섬세한 건축형식이 잘 나타나 있다.경사지를 이용한 관계로 전면의 기둥이 2 단으로 구성되었다. 얕은 기단 위에 돌기둥으로 마루 아래를 받히고, 마루 위로는 둥근 나무기둥을 세웠다. 가운데 2칸이 온돌방이며, 양쪽에 1칸씩 마루방이 시설되어 있어 영남 지방 여타의 정사의 구조와는 다르다 하겠다.좌측 마루방 뒷면에는 반침이 있고, 전면을 제외한 3면에는 쪽마루를 시설하여 이동을 편하게 하였다. 왼쪽 기단위에 나무 계단을 설치하여 마당에서 툇마루로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조상덕(1808∼1870)의 자는 비만(庇萬)이며, 호는 위재(危齋)이다. 술언(述彦)의 아들이다. 삼종조(三從祖) 가은(可隱) 조학수(趙學洙)에게 수학하고 과거에 실패한 후 출사의 뜻을 끊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으며, 대순(大舜)의 인심유위(人心惟危)와 도심유징(道心惟徵)의 훈계(訓戒)에 깊은 뜻이 있다하여 위재(危齋)라 호를 짓고, 잠(箴)을 지어 스스로 성찰하기에 힘썼다. 입지가 확고하여 궁행실천(躬行實踐)으로 유행(儒行)을 찾았으며 빈한으로 구차하였으나 항상 충후(忠厚)로 일관한 인물이라 전한다.위재는 「용산정사와용당기(龍山精舍臥龍堂記)」에서 “9대 조(祖) 검간(黔澗)의 양진당 뒤쪽 선고 묘(先考墓) 밑에 와룡당을 짓는다.”하였으니, 선업(先業)을 잇고 은거자적(隱居自適)하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그의 ‘우음(偶吟)’이란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몸가짐은 처자 같고(持身處子是), 수행은 꼭 승려 같네(修行定僧如). 평생에 아는 것이라고는(平生自知我), 성현의 글을 즐기는 일 뿐이네(所樂聖賢:1:2 書). “라고 읊어, 평소 위재의 생활상을 엿보게 하였다. 『위재공고(危齋公稿)』 6권3책 목판본이 전하는데, 1921년 후손들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유필영(柳必永)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중철(李中轍)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권1에 시·만사 78수, 권2에 서(書) 48편, 권3에 잡저 14편, 서(序) 5편, 기(記) 3편, 발(跋) 1편, 잠(箴) 3편, 고유문 4편, 묘지명 1편, 행기(行記) 1편, 권4에 부록으로 묘갈명·발 각 1편, 권5·6에 유례편해(儒禮編解)가 수록되어 있다.문화재명 : 상주 승곡리 용산정사(龍山精舍)소 재 지 :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216번지(양진당길 17-40) 지 정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38호(2003. 4.14)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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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고택(依岩古宅)
양진당 근처의 승곡마을에 있던 동고공(東皐公 從10代祖) 종택을 이건한 것이다. 안채는 공의 증조모인 모임당(慕任堂)연안이씨(1749~1826)가 1800년경에 건축하였고, 사당, 사랑채, 안사랑채 등은 1920년 경 만당(晩堂) 조태연(趙泰衍, 1877~1934)이 지은 것이다. 조범구(趙範九, 1834~1896)선생의 號가 依岩이다.대문간과 평행으로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배치되었는데, 별도로 일우당(逸憂堂)이라고도 한다.참고문헌 [상주의 문화재] 문화재 지정 : 지방문화재 문화재 자료 제177호(1986.12.11)소 재 지 : 낙동면 운평리 141-1번지소 유 자 : 조준희형태 및 구조 : 목조 팔작지붕수 량 : 5동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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