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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목사 이협(李埉) 선정비(善政碑)
남적동 가는 다리 마을에서 함창으로 가는 구도로에 세천교가 있고, 이 세천교옆에상주 목사 이협(李埉)(재임기간1746~1750)의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비갓과 비신을 한돌에 새겼는데 비좌를 시멘트로 보강하였고 비문은 마모가 심하다. 비갓은반원형에 보주를 얹은 형태이다. 비명은 “牧使李候埉僧人善政碑”이고 좌우로 비문을 새겼다. 비명에 승인(僧人)이라 쓰고 있어 비 건립 당시에는 승(僧)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건립시기는 “00十三年戊辰七月”의 기록으로 보아 1748년(乾隆13년, 영조24년)이나 1808년(嘉慶13년, 순조8년)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비신 높이 104cm, 폭 46cm이고 비수의 높이 46cm, 폭68cm이다.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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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임란북천전적지 비석군(碑石群)
임란 북천 전적지 내 5기의 비가 있다. 상주관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시청으로 옮겼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모두頌德碑, 不忘碑들이다.① 觀察使洪相國祐吉永世頌德碑(121×59×26cm) 관찰사 홍우길(재임기간 1858~1860)의 송덕비이다. 庚申四月下澣(철종 11년, 1860년)에 세웠다. ② 巡相國金公明鎭頌德碑(151×50×27cm) 순찰사 김명진(재임기간 1888~1890)의 비이다. 원래는 성하동 비석거리에 있었다. 비수(碑首)를 잃었고 전면에 비명과 비문을 넣고 이면에 庚寅四月日立(1890년) 看役吏 김재율(金在律)의 기록이 있다.③ 牧佰牛峰李公銜橲碑(146×51×24cm) 목사 이함희(李銜橲, 재임기간1879~1882)의 비이다. 원래는 비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전면에만 각자했는데 하단의 비문은 확인되지 않는다. ④ 牧使閔侯種烈永世頌德碑(125×40×17cm)목사 민종열(재임기간 1885~1893)의 송덕비이다. 비갓을 잃었고 전면에 비명과 비문을, 후면에 건립관련 기사를 새겼다.“崇禎後戊子十日月日”(1888년)의 기록으로 보아 재임중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⑤ 牧使閔侯種烈永世不忘碑(136×46×18cm) 목사 민종열의 不忘碑이다. 당초에는 비갓이 있었던 듯 하다. “光緖十六年月日 간역리(看役吏) 김재율(金在律)의 기록이 있어 재임 중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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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사(城隍祠)
성황(城隍)은 우리나라에 대표적인 민간전승신앙이다. 성황사(城隍祠)는 조선 광해군 9년(1617) 창석(蒼石) 이준(李俊)선생이 편찬한 상산지(商山誌)의 추사조(秋祀條)에 처음 기록되어 있다. 성황사(城隍祠)는 무속신앙(巫俗信仰)을 받드는 곳이 아니라 일찍부터 城隍神을 숭배하였던 성스러운 곳으로서 근래에는 상주시민체전(尙州市民體典)의 성화(聖化)를 채화(埰火)하는 장소(場所)이기도 하다. 성황사상은 중국에서 전래되어 성황신은 만신(萬神)의 주(主)라는 토속신앙화(土俗信仰化)하였는데, 이 곳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상주 목사(牧使)와 고을의 향리(鄕吏)들이 매년 고을의 안녕(安寧)과 풍요(豊饒)로움을 기원하는 성황제(城隍祭)를 지내던 곳으로 위치는 시내에서 북쪽에 위치한 만산동 안너추리 마을 뒤편의 천봉산 산록에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성황사 주변으로는 큰 바위가 많고, 앞쪽에 영암각(靈巖閣)이 자리 잡고 위쪽에 산신제단(山神祭壇)이 남아있다. 건축물(建築物)은 일자형평면(一字形平面)에 정면(正面) 3칸(6.6m), 측면(側面) 2칸(4.25m)으로 外部에서 보기에는 양뢰간은 온돌방이고 중앙칸은 마루방 형태(形態)인 듯 하나 통칸으로 3칸에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자연석 기단위에 네모기둥을 세웠고, 전면에만 출입문을 달아 출입하고 있다. 신위로는 내부 어칸 뒷벽에 목각의 부부신상을 모셨다. 목부재는 구부재를 재사용한 흔적이 많다.건물(建物) 전체(全體) 모습이 민도리 팔작집 형태로서 사당의 구조형식(構造形式)을 따르지 않은 독특한 양식(樣式)이다.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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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각(靈巖閣)
천봉산(天峰山 435.8m)은 상주 삼악(三嶽)의 하나인 석악(石嶽)으로 불리우며 상주의 진산(鎭山)으로 자리하여 일찍부터 민속문화를 발생시켰다.영암각의 바위는 만산동 성황사 바로 앞에 남향하고 있다.“상주에 부임하는 목사(牧使)가 북행(北行)을 하면 자주 해(害)를 입었고 불상사(不祥事)가 잦았는데, 어느 목사(牧使)의 꿈에 큰 바위가 나타나 자신의 몸을 풍우(風雨)로부터 막아 주면 재앙(災殃)을멸하겠다 하여 바위에 보호각을 지어 모시니 재앙이 없어졌다는” 암석신앙(巖石信仰)의 전설(傳說)에비롯하고 있는데, 상산지(商山誌)에 의하면 1855년 홍종무 목사(洪鍾茂 牧使)가 중창했다는기록(記錄)으로 보아 이 전에 건립(建立)한 것으로 보이며 1935년 10월에 수리한 바 있다.건축양식(建築樣式)은 전면(前面)과 측면(側面) 한쪽은 창살(홍살문형)으로 내부(內部)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후면(後面)과 측면(側面)한쪽은 회벽으로 막아놓은 특이한 건축양식(建築樣式)을 보이고 있다. 각(閣)은 거대한 바위를 보호하기 위해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익공 팔작집이다. 바위 동면에는2개의 불망비가 새겨져 있다. 건물은 경사진 대지에 전열(前列)에만 고주를 세우고, 전면 및 측면앞칸 상부에 살창을 내었다. 각 주칸의 창방위에는 정면 어간에 3소로 초각화반, 양협칸에 1소로원형화반을 놓아 처마를 받도록 했다. 익공형상은 조선후기의 수법이다.○ 영암각내 불망비(不忘碑) 현황 1. 상주 목사 홍원섭(洪元燮) 불망비(不忘碑)만산동 영암각(靈巖閣)내 영암에 새겨 놓은 목사 홍원섭(재임기간 1786~1788)의 불망비이다.영암이라 불리는 암석의 한면에 호패형으로 바닥을 정면하고 중앙에 종으로 자경 6cm 내외로 “牧使洪(候)元燮永世不忘碑”라 새겼고 비문은 없다. 비명 좌측에 “乾隆五三年武臣五月”의 조성기록이 있어 정조 12년(1788)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수와 테두리 부분은 돋을새김으로연문위에 연화문을 조각하였다. 비 옆에는 별도로 영암각 중수에 관계한 호장(戶長) 차유상(車有尙)등 4명의 명단을 새겼다. 규모는 높이 78cm, 폭31cm, 비수 높이 20cm,폭 55cm이다.2. 상주 박만식(朴晩植) 불망비(不忘碑)상주 목사 홍원섭(洪元燮) 불망비(不忘碑)의 좌측에 새겨진 마애비(磨崖碑)이다. 각자 내용은 “首書記朴公晩植永世不忘碑 重修城隍”이다. 영암각 뒤편에 있는 성황사(城隍祠)의 중수(重修)와관련한 기록으로 추정된다.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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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양동 충효각(忠孝閣)
이 충효각은 무양동 상산유도체육관 앞 상주시 무양동 197의 1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 충효각은 경주인 이삼억과 그의 아들 경번(慶蕃), 증손 연하(挻夏), 현손 복운(復運)의 사대에 걸쳐 충효를 기리기 위해 유림에서 건립하였다.이삼억은 학문과 덕행이 높았으며 무신정변(이인좌의 난)때에는 큰공을 세운 분으로 나라에서충신으로 봉하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그의 증손 정하는 효성이 지극했다. 어머니의 중병에 청계산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 때 호랑이가나타나 해송자 한 알을 주어 이것으로 어머니 병을 낫게 했다. 그 뒤 어머니의 장사 때는 어떤신선이 꿈에 나타나 묘 자리를 정해주어 그 묘 터를 효갑소라 하기도 한다.그의 현손 복운의 부인 연안 차씨는 남편을 여윈 뒤 40여 년간을 혼자 지내면서 시부모를 지극한효성으로 모셨다. 그의 종질 경대는 순조 때 사람으로 뛰어난 효성에 경향 각지의 인사들을감동시켰으며 한 집안에서 1충 3효의 빛나는 전통을 세웠다고 하겠다.각은 단칸에 내외 1출목의 다포 맞배집이다. 전면에만 살대를 세우고, 나머지 삼면에는 하부에벽을 치고 상부에 살대를 세웠다. 가구는 간략한 3량가이다.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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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의사단비
북천변의 임란북천전적지 내에 있다. 이 비각에는 임진왜란(1592년) 때 이 곳 북천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국한 3충신(종사관 윤섬,박호, 이경류)과 2의사(의병장 김준심, 김일)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충신의사단비」가보호되고 있다.「충신의사단비」는 1793년 (정조 17년)에 사액 받아 충의단에 비를 세웠는데 임란북천전격지를조성하면서 태평루에서 충열사로 가는 길의 우측으로 단을 마련하고 근년에 세운 4기의 순국비(박걸, 김종무, 권길, 충열사유허비)와 함께 복원하였다. 임진왜란때 순절한 판관(判官) 권길(權吉)(재임기간1591~1592) 사의비(死義碑, 총고181cm, 비신높이154cm, 폭67cm)는 창석(蒼石) 이준(李俊)이 선생이 찬(撰)하여 1698년 (숙종 24년)에 건립된 충렬사에 세었는데 충렬사가 훼철되면서 자산 아래로 1991년에 임란북천진적지를 조성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비문의내용은 마모로 인해 확인되지 않는 상태이다. ※ 판관(判官) 권길(權吉, 1541~1592)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응선(應善),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후손이다.음사로 출사하여 제원도찰방, 군위현령을 거쳐 1591년 상주판관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걸(朴傑), 김준신(金俊臣)등과 함께 상주성을 지키다 북천에서 전사하였다. 광해군 4년(1612)에 사의비(死義碑)가 세워졌고, 숙종대(1675~1720)에는 상주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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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루(太平樓)
태평루(太平樓)는 조선시대 1808년(순조 8년)에 상주목사 정동교(鄭東敎)가 세운 관루(官樓)이다. 처음 왕산을 중심으로 쌓은 상주읍성의 관아문의 내삼문 밖에 세워 동헌의 문루로 사용하였다.그 후 1920년 남산의 상주향교 동편에 있는 동산으로 옮겼고, 1960년 향교서재 부근으로 옮겨 남산중학교 교사로 사용하다가 북천전적지가 조성됨에 따라 199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5량가의 2층 누각건물이다. 건물은 별주를 세운 하부는 개방된 공간이고, 이층에는 벽체없이 우물마루를 깔고 사면으로 헌함을 돌렸다. 좌 협칸 뒷칸에 이층으로 통하는 목재계단을 놓아 오르내리도록 했다.공포는 외1출목의 주심포계, 건물이고, 주상부에는 삼소로를 올린 보병화반 1구씩 놓아 처마를 받도록 했다.상부가구는 건실하고, 마룻대는 겹장혀에 파련대공으로 지지했다.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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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천정(枕泉亭)
이 정자는 조선시대 1577년(선조 10년)에 상주목사 정곤수(鄭崑壽)가 상주유성 남문 밖에 건립하고연당이라 이름 지어 선비들이 휴식처나 글 짓는 곳으로 사용하던 관정(官亭)이었다.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2년(광해군 4년)에 상주목사 한술(韓述)이 중건하고,1614년(광해군 6년) 상주목사 강복성(康復誠)이 천향정(天香亭)으로 개칭하였으며,1693년(숙종 19년)에 목사 이항(李恒)이 정자를 홍백련 두 연못 가운데 서게 하고 연지를홍백연당으로 고치고 이향정(二香亭)이라고 개칭 하였다.그 후 일제시대인 1914년 도시정비계획에 따라 상주읍성이 헐릴 때 지방의 뜻있는 유지 10여명이정자를 사서 현 북천전적지 위치로 옮기고 군수 심환진이 침천정이란 이름으로 고쳐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이익공 5량가의 단아한 팔작집이다. 온돌방 2통칸과 마루 4통칸을배열하고, 마루 전면에는 험함을 돌렸다. 마루는 우측과 후면으로 심벽에 두짝 울거미띠장 널문을 달고 바깥으로 쪽마루를 내었다. 대청상부의 충량머리는 용두로 장식하고, 각 주간에는 보병화반 1구씩 놓아 처마를 받았다.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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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관(商山館)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 상산관은 고려시대에 창건하여 상주 고을의 객관으로 활용하다가 고려 충렬왕33년(1307년) 당시 목사 김영후가 중수했다는「상산지」기록으로 보아 이보다 앞서 건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객사이다. 조선 중종 21년(1526) 화재로 소실된 것을 목사 윤탕이 중건하였으나 선조 39년(1606)에 재건하였고, 임진왜란때 다시 소멸되어 조선 현종7년(1676) 목사 이송령(李松?)이 민폐를 끼치지 않고 관원으로 옛자리에 개축하였다. 동성동 현 상주경찰서 자리에 있었으나 1940년 상주여자중학교 자리로 옮겨와서 음악교실로 사용하였다가 건물이 침하되어 1991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건물은 궁궐 방향으로 한 전패를 모시는 주관(主館)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관원들이 머무는 서익헌(西翼軒), 동익헌(東翼軒)을 반칸정도 멀어져 두었다. 지붕은 주관만 맞배이고, 서익헌(西翼軒), 동익헌(東翼軒)은 주관과 마주하는 부분만 맞배이고, 나머지는 팔작이다. 기둥은 온돌방 부분에만 네모기둥이고 나머지는 두리기둥에 전후퇴 7량가를 올렸다. 규모가 장대할뿐만 아니라 지붕에 용두(龍頭)가 잘 남아 있다. 일명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고을마다 설치되었다. 전패(임금을 상징하는 나무 패, 지방 객사에 전자를 새겨 세워 그 곳 관원이 배례하던 나무 패)를 안치하고 목사가 부임하면 이 고을에 무사히 오래 근무하게 되기를 빌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대궐을 향하여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빌고 절을 하는 향궐망배 의식을 행하였고, 나라의 즐거운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모든 관원이 여기에 모여 참배하였다. 한편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던 곳이다. 구조는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을 두고, 앞면에는 중문, 외문, 옆면에는 무랑 등이 부속되어 있으며, 정당은 기와 난 돌을 깔고 좌우 익실은 온돌로 만들었다. 이름하여 상산관(商山館)이라고 했다. 창건 연대는 상산지 2권 객관조에 <본 고을 목사 홍세주가 창립하였고 제도가 크고 중앙에 전패를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목선생 안에는 홍 세주의 기록이 없는 즉 연대는 고증하기 어려우나 상산지 상권 동조에 <고을 아문 동쪽에 고려 때 김영후가 목사로 와서 다시 고쳐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1340년 (고려 충혜왕 때) 이전이라고 볼 수 있다. 목사 안 축이 1343년(충혜왕 4) 기문을 지었는데 그 기문이 상산지에 기록되어 있다. 목사 안 축이 1343년(지정 3. 계미)에 상주의 책임을 맡아 이 해 4월 고을(상주)에 부임하여 보니 근년에 모진 정치에 백성이 흩어지고, 고을에 있는 관사, 학교, 신사, 절 등이 모두 퇴폐 하였으나 오직 객사가 웅장하게 남아 있어 남쪽 지방에서 제일 가는 규모이더라. 생각컨데 이것은 속된 사람이 보통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고 여겨 고을 사람에게 물으니 김 상국 영후가 지었다 하더라. 이 고을은 사면 팔방으로 통하는 요긴한 곳이 되므로 객관이 완성된 뒤에 그 서쪽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사신이 많이 오고 거처하기에 여유가 있더라.> 위의 기문을 통해 보아 경상도 전 지역에서는 가장 웅장한 건물이었으리라 믿어진다. 목사 윤 탕이 1500년(연산 6)경에 개축하였으나 1526년(중종 21년)화재를 당하였고, 1592년 임진란 때에 왜군이 모두 불태웠고, 목 선생안의 조 계원조에 의하면 <1638년(인조 16년) 2월에 도임하여 11월에 객사가 불이 나 이듬 해(1639년) 봄에 객사를 왕산 남쪽에(현 경찰서 자리)에 옮겨 세우고 5월에 사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객사를 처음 세운 곳은 확실치 못하다. 상산지에 의하면 목사 이 송령이 1666년(현종 7년)에 옛 자리에 개축하였다고 하였다. 1907년 (고종황제 11년)에 객사를 공립 보통학교로 쓰고 1910년에 현재의 상주여자 중학교 자리로 이전하여 상주 여자 간이학교로 쓰게 되었다. 군수 김규연이 쓴(1940년) 객관기에 의하면 객관을 1907년에 이를 새로 고치고 소학교로 쓰다가 북정학교(현 상산 초등학교)를 지어서 나가니 집이 비어서 허물어졌다. 그래서 박인양, 조용연, 박인수, 박정소 네 사람이 읍의 오랜 건물을 없앨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많은 돈을 내어 관으로부터 샀다. 이것을 다시 군에 기부하였다. 그래서 옮겨 짓기로 생각하고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조각연이 기성의 책임을 맡아 많은 사람들의 돈으로 보조하여 완공되었다. 옛 모습 그대로 옮거니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물건이 폐하고 흥하는 것은 깎고 회복하는 이치이고, 사람이 자선하면 사회에 복이 되는 것이다. 앞의 네 사람이 옛 물건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 집이 상산 땅에 옛 모습을 재현할 수 있었겠는가?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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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민요(尙州民謠)
○ 명 칭 : 상주민요○ 문화재 지정 : 지방무형문화재 제13호(1989.5.13 지정)○ 상주는, 고래로 웅주요 고도로서 넓은 평야를 소유하고 있어 영남의 곡창지대로 일컬어져 왔으며삼백(三白 : 쌀, 누에고치, 곶감)의 고장다운 천혜의 자연 조건을 고루 갖춘 지방이다. 공갈못이고령가야 시대 내지 삼한 시대에 축조되었다 하니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상주의 농경문화는 일찍부터 발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벌모 심을 때의 모심기 소리인 공갈못 노래가 노동요로서 면면히 이어져왔고, 소수주민에 의한것이긴 하나 논매기 소리, 타작소리가 최근까지 보존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특히, 공갈못노래는 고려 이전 이미 불렀을 것으로 추정되며 연정가로서 채련요(採連謠)는 상주 문경 뿐 아니라낙동강 연안 및 경상도 내륙 지방을 비롯해 멀리 전북의 내륙까지 전파, 불려져 온 상태다.이 농요는 연정 외에도 사친(事親),완월관어(完月觀魚), 채련(採連)등의 주제를 담고 4.4조의 구성진 가락으로 널리 전파되는 사이 생략형, 복합형, 후렴 첨가형 등의 다른 형태가 생기고 근자에는 이를 편곡하여 일반 대중의 향토민요에도 활용하고 있다.○ 아시논매기 소리와 두불논매기 소리 및 자리개, 도리깨 타작 소리는 상주시 초산동 특유의노동요로서 마을 주민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이다. 전승자의 계보는, 강덕기(초산동 거주, 작고),이인규(초산동 거주, 작고) 이종완(20세부터 민요판에 참가 전수함), 김화경(초산동 거주, 지정당시 50세,1936년생), 육종덕(초산동 거주, 1933년생)씨 등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상주민요 소개 ★★◉ 모심기 소리(공갈못 노래, 채련요)상주함창 공갈못에 연밥따는 저처녀야/ 연밥 줄밥 내따줄게 이네품에 잠자주소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따기 늦어가요/ 상주함창 연당안에 연밥따는 저큰아가연밥줄밥 내따줌세 백년언약 맺어주소/ 백년언약 어렵잖소 연밥따기 늦어간다.능청능청 벼리 끝에 시누올케 마주앉아/ 나도크서 시집가면 우리낭군 섬길라네◉ 논매기 소리1. 아시 논매기(호미를 사용)아시 논매기는 복장을 편리하게 하고(바지는 무릎 위로 걷어올리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올림)삿갓을 쓰며 도랭이를 허리에 맨다. 선소리꾼은 논매기 대열 중앙에 서며 선소리꾼이 선창을하면 논매기를 하면서 일제히 후창을 한다. 이때 여자들은 논의 좌우 가장자리에 나누어 술참을 마련해 놓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권하기도 한다.비가오네 비가오네 우장입고 논을 메세/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호호호 호야 해해해 해야 에하 / 소호니 절로한다(후렴)여보시오 농부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에해이 소호니 절로한다 오곡은 어느 누가 내 놨는가/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신롱씨가 내 놨다네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일년농사 지어보세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이 농사를 지어서러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부모 공양하여 보세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어린자식 길러보세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나라에 충성하고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부모에 효도하고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일가친척 화목하세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오늘 논은 박두불네 논이라네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알뜰이도 매여주세 / 에헤니 소호이 절로한다 알뜰이도 매자하니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오뉴월 뜨거운 빛살 등에 지고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묘등같이 지선 논을 매자 하니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땀이 눈을 가려 거북하네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어금니를 앙시물고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부지런히 매여보세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늦어가네 늦어가네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주야참이 늦어가네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어서매고 쉬어보세 / 에헤이 소호니 절로한다 2. 두불 논매기(아시 논매기 후 손으로 매기)두불 논매기는 삿갓과 도랭이를 벗어두고 손으로만 논매기를 한다. 처음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길게 늘어서서 선후창을 하면서 논매기를 하다가 중앙의 선 소리꾼을 중심으로 차츰 차츰조여들어 박진감있게 끝맺음을 한다.우장 벗고 두불논 매세/ 에헤니 소호니 절로 한다호호호 호야 해해해 해야/ 에햐 소호니 절로 한다.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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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시민체육공원
□ 면적 : 80,000여㎡ □ 부대시설 : 야외음악당 1개소 · 조명탑 1개소 · 공중화장실 1개소, 간이화장실 5개소 · 비상급수시설 1개소 · 길거리 농구장 1개소 · 각종체력단련시설 17종 49점 □ 1일평균이용인원 : 400여명 정도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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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북천전적지
★ 경상북도 기념물 제77호★ 소재지: 경상북도 상주시 만산동이곳 북천변 자산 기슭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시 왜군에 대항하여 우리 관군과의병들이 격전한 전적지이다.이 전투에서 순변사 이일이 인솔한 관군과 상주지방에서 창의한 의병들이 왜군의 기습을 받아서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과 상주판관 권길, 사근도 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김일 등 수 많은 군사들이 순절하고 패전 하였으나 임란사상 중앙 관군과 의병들이 뜻을 모아 왜군에 대항한 첫 전투라는데 큰 뜻을 지니고 있다.1990년부터 사당, 전시관, 사적비 등을 세우고 원래 있었던 박걸 단소 및 권길 사의비를 이건하여 사적공원으로 조성 하였다.1592년(임진왜란) 때 조선 중앙군과 왜병의 선봉주력부대가 최초로 싸운 장소로 900여 명이 순국한 호국성지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일(李鎰)을 순찰사로 임명하여 상주 북방 북천에 진을 치고, 고니시가 이끄는 왜병 1만 7천 여명에 대항하였으나 패하였다.이곳에는 순국한 9위를 배향하고 있는데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 중앙군과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김일과 무명용사 1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1990년부터 정화사업을 실시하여 임란북천전적비를 건립하는 등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조성하고 있다.임란북천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중앙군과 향군이 왜군의 주력부대와 회전하여 900여 명이 분연히 순국한 호국의 성지로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이를 막기 위해 급히 남하하여 4월23일 상주에 도착한 조선의 중앙군 약 60여 명과 상주판관 권길, 박걸이 밤 세워 소집한 장정 800여 명 등 900여 명이 17,000여 명이나 되는 왜병과 분전하여 전원이 순국한 곳이다.매년 양력 6월 4일 제향 행사를 거행하여 그 분들의 넋을 기리고 후세들의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요시설(총 면적 9,915평)충렬사, 상산관(지방유형문화재 제157호), 침천정, 태평루 등이 있음 ◈ 개장시간 09:00 ∼18:00 ◈ 찾아가는길 상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Km 거리 (승용차로 5분 거리)
20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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