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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곡/폭포

전체게시물 7건 / page

  • 관광지명 : 옥량폭포주 소 : 화북면 입석리
    입석 1리 옥양동의 석문사 깊은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구름다리사이로 무지개빛 옥수를 토해내니 옥량폭포이다.화북면 입석리 옥량동의 계곡에 있다. 백악산이 길게 뻗은 줄기의 북면(北面)이다. 이 쪽은 남면인 용화쪽의 유순(柔順)과는 대조적으로 암만이 험준하고 인상이 강직하다.이러한 산세에 따라 계류 또한 굴곡(屈曲)과 영진(盈進)이 무상(無常)하여 격탄(激灘)과 청간(淸澗)과 청담(澄潭)이 연속되었다가 마침내 조화의 극치인 이 옥량과 폭포가 이루어졌다.옥량은 길이 약 20m, 넓이 2m, 암석이 대들보와 같이 또는 교량과 같이 폭포위에 걸쳐져 있는 천상작품이다. 처음은 둥글고 가늘다가 갈수록 모나고 넓고 커졌다. 무엇이라 어떻게 표현이 어렵다.아무튼 밑으로 물이 흐르니 하나의 돌다리다. 그러나 다시 보면 백포(白布)와 같이 폭포를 매어 단 대들보이다. 자세히 보면 조화의 공법은 시종과 표리가 분명하고 또 완전하며 귀중한 것을 감추는 배려도 있었다.그냥 하나의 돌을 걸쳐 놓은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전후(前後), 방원(方圓), 후박(厚薄) 모두 다 있고 조금도 부러지거나 흔들릴 염려가 없는데도 가운데에 큰 바위로 고임돌을 세워 안전을 다하였다.그러나 다리를 건너 가려면 약간 비탈져서 조심이 없이는 어렵다. 기어가거나 타고 가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언의 교훈을 준다. 그런가 하면 다리에서 보면 위에서 오는 물은 큰 바위를 늘여 세워 가리고 밑으로 흐르는 물은 단애로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비경을 만든 것이다.비록 국(局)은 적으나 별건곤(別乾坤)이다. 폭포는 옥량위의 바위밑에 청담(淸潭)을 만들어 많은 물을 모아서 한숨 쉬고는 넓은 암반에 다 넓게 펴서 잔잔히 비늘지어 살며시 옥량밑으로 내리다가 그대로 10여장을 떨어진다.억겁을 떨어지고 또 떨어져 바위가 닳고 뚫어져 구멍이 나고 골이 지고 웅덩이가 되었다. 모두가 다 흰돌이고 그 사이를 물이 흐른다. 넓직 넓직한 반석이 깔리고 굵직굵직한 바위가 널려 있다. 위에는 늙은 소나무가 서고 틈에는 철쭉이 꽃을 피운다.조그만한 모래사장이 생기고 어김없이 갈대가 나고 땅버들이 났다. 그리하여 천여 객이 함께 와도 쉴 그늘이 있고 앉을 반석이 있고 목욕할 웅덩이가 있다. 또 몇날을 보아도 못다 볼 경관이 있다.오리의 계곡이 굽이마다 풍경을 새롭게 하고 돌마다 바위마다 모두가 특색이 있다. 화초가 있어 향취가 있고 수림이 있어 바람 소리 상쾌하다. 층을 지어 대가 되고 높이 솟아 누각이 되고 넓직이 펼쳐서 정자가 되었다. 이 모두가 천작이다. 속세의 풍물은 원래가 아니다.지척에 상주와 청주를 연락하는 포장도로(국가지원지방도 32호선)가 있다.폭포 옆에 작은 굴이 있다. 겨우 한사람이 들어 갈 수 있다. 내부에는 바위가 엉켜있고 어두워서 자세히 관찰할 수 없으나 기괴한 형상들이 널려있어 흥미롭고 나오는 곳은 한층 위이다.어찌보면 지상과 지하의 대조를 위한 것 같고 아니면 위에 있는 보굴의 시작품인 것 같다. 계곡 상류의 중복(中腹)에 거대한 층암이 마치 지붕과 같이 생겨 있고 그 안에 굴이 있다. 이름하여 보굴(寶窟)이다.굴안에 미륵불상이 있고 그 뒤에 가파른 층벽을 나무를 휘어잡고 올라가서 왼쪽으로 들어가는데 깜깜하게 어둡고 암벽사이의 통로도 좁아서 몸이 조금 큰 사람은 나갈 수 없다. 30m쯤 들어가면 뒷굴이 나온다. 이 굴은 방 하나와 부엌 하나가 될만한 크기이다.다시 위로 오르면 밖으로 나와서 산등으로 오르게 된다. 이 보굴에는 정감이 넘치는 전설이 전해 온다.세조의 공주와 김종서의 손자가 원수의 자손인줄 서로 모르고 이 굴속으로 피신하여 앞과 뒤의 굴에서 각기 살다가 결혼하기에 이르니 결국 원수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굴이므로 보굴중의 보굴이다.근래까지 굴 앞에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정화(淨化)되고 자연의 동굴과 정화(情話)만이 남아 있다가 근래에 석문사(釋門寺) 불사가 진행 중이다.동네의 맞은 편 의상동에 큰 저수지가 있고 못 밑에 작은 암자가 있어 이곳의 관광에 한 몫을 더하고 있다.
    관리자   2018-01-12 17:34:01
  • 관광지명 : 경천대주 소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삼덕리
    영남인에게 낙동강은 온유하고 넉넉한 어머니의 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먼 옛날부터 낙동강물을 끌어당겨 농사를 지었으며, 산업화가 시작되자 강물로 공장을 돌렸다. 언제나 한가롭게 굽이치며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던 낙동강. 그러나 낙동강도 상주에서만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서쪽 면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룬 천주봉과 만나 부딪히며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을 빚어냈기 때문이다. 이 아찔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노라면 여기서만은 생활 속의 낙동강이 아니라 환상 속의 이름 모를 물줄기라는 느낌이 든다. 이처럼 낙동강의 아름다운 전경은 끊어질 듯 말 듯 하며 계속 이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 경천대이다.경천대에는 하늘로 우뚝 솟아오른 절벽 위로 송림이 우거져 있고, 반대편에는 금빛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그 사이로 푸르디푸른 강이 흐른다. 이 눈부신 절경을 경천대에서 내려다보면 이곳의 빼어난 경관에 대한 찬양과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수영장을 비롯한 전망대, 어린이 놀이시설, 야영장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하기 좋다.뿐만 아니라 경천대에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정기룡 장군이 젊었을 때 이곳에서 용마와 더불어 수련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때 장군이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말먹이통이 남아 있다. 또 병자호란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갈 때 따라가 함께 고생했던 우담 채득기 선생이 후일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은거했다는 무우정이 있다.인근에는 상주가 자랑하는 전사벌 왕릉이 있다. 옛날 이 일대를 지배하던 부족국가 사벌국의 왕릉이라 전해지고 있고, 사벌국면 화달리에 위치해 있다. 능 아래에 사벌국왕릉사적비와 사벌국 왕 신도비가 있다. 또한 근처에는 화달리 3층석탑(보물 제117호)도 있다.함창읍 증촌리에는 전고령가야왕릉이 있는데, 1592년 선조 25년 경상도 관찰사 김쉬와 함창 현감 이국필에 의해 묘비가 발견되어 가야왕릉임이 확인되었다. 왕릉과 왕비릉이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정기룡 장군의 유적지인 충의사는 사벌국면 금혼리에 있다. 공검면 오태리에는 오태저수지가 있으며, 사벌국면 삼덕리에는 경천대관광농원이 있다. 또한 삼한시대 축조한 저수지인 공갈못 옛터도 있다.숙박은 상주시내에서 여관을 이용할 수 있고, 경천대에는 야영장과 취사장이 마련되어 있다. 교통안내 상주 →경천대 1일3회 시내버스. 찾아가는 길 상주→사벌국면방향 →충의사 →傳사벌왕릉→ 경천대.  
    관리자   2009-09-08 06:41:00
  • 관광지명 : 공검지(공갈못)주 소 :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
    공갈못은 의림지 벽골제 등과 같은 시대인 삼한시대에 수축된 저수지로 역대 여러 차례의 보수를 하였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길이 없고, 다만 고려 명종 때 최 정빈이란 분이 고쳐 쌓았는데 못 둑의 길이가 8백 6십 보이고, 못 주위의 길이가 1만 6천 6백 4십 칠척이라 상산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 못에 물이 차면 수심이 다섯 길이나 되었고, 서쪽 못 가로는 연꽃이 만발하는데 그 절경을 중국의 전당호에 비길 정도라 했다.전설에 의하면 이 못의 얼음 어는 것을 보고 흉년, 풍년을 예측하였다고 한다. 또 정월 열나흗날 밤, 소들이 땀을 흘리는데 그것은 밤을 이용하여 소들이 못에 얼음을 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 경주 용담의 암용이 공갈못 숫용에게 시집온 이야기도 있다. 또 볶은 콩 서되를 하나씩 먹으면서 말을 타고 못 가를 돌아도 콩이 모자란다는 말도 있다.속설에 "저승에 가도 공갈못을 구경하지 못한 사람은 이승으로 되돌려 보낸다"고 하였다. 함창 읍지에는 이 못의 서반에는 몇 리에 걸쳐 연꽃이 피어 있으며 마치 중국의 전당호를 방불케 하는 풍취를 지녔다고 하여 그 아름다움과 연꽃의 풍광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옛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주옥같은 글을 남기어 그 아름다운 풍광을 연상케 하여 준다. 이 못의 이름이 공갈못이라 부르게 된 것은 못 둑을 쌓을 때 "공갈"이라는 아이를 묻었다는 매아설화에 의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향민들은 이 못을 신비롭고 여험스러운 영지로 신앙하여 왔다.이제는 이와 같은 전설과 연밥 따는 노래가 공갈못을 상기시켜 줄 뿐 못은 논으로 변하여 그 모습과 풍광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옛 못을 알려주는 비석이 옛 못 뚝에 외롭게 서서 이곳을 찾아주는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서운한 발걸음을 되돌려야 하는 곳이 되었다. 공갈못 하면 곧 우리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것은 연밥 따는 노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노래는 공갈못을 배경으로 하여 발생 형성된 민간의 노래로 지방성과 토속성을 짙게 띈 민요의 성격으로 이 노래의 내용은 연정, 사친, 완월관어, 호련 등의 유형을 이루었다.형식으로는 기본형, 복합형, 생략형, 후렴첨가형 등이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노래는 동남 동녀를 대상으로 한 한국민요의 대표할 만한 노래군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래군이 상주, 함창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 전승 보존되는 이 지방 특유의 무형 문화재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통안내 · 상주→점촌방면 (공검면소재지).· 동서울 및 강남고속터미날→상주→공검 찾아가는 길 공검면소재지 위치  
    관리자   2009-09-08 06:39:06
  • 관광지명 : 낙화담주 소 :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에 낙화담이 있다. 이곳 낙화담의 제단 비각은 조선시대 1850년(현종 16년)에 유림과 후손들이 나라의 명정을 받아 건립하여 오랜 세월을 전래해 오는 동안 몇 차례의 중수를 한 흔적은 있으나 근래에는 퇴락 되어 보기 흉한 정도로 보존되어 오던 것이다.상주시에서는 충효의 산 교육으로 활용 보전하기 위하여 군비로 단각과 담모제를 보수하고 담장과 삼문을 신축하였으며 후손 부담으로 민가 3동을 철거하는 등 정화하였다.이곳 낙화담은 원래 1,500여 평이나 되는 못이었으나 지금은 줄어들어 60여 평 남짓한 못이 되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못은 판곡 마을의 안산인 속리산 줄기의 백화산이 화성을 띄우고 있다는 풍수 지리설에 의하여 그 화기를 중화시켜야 한다고 믿어 마을 사람들이 만들게 된 못이라고 한다.그 후 임진왜란을 당하여 김 준신이란 분이 상주성에서 왜적을 많이 죽였으므로 그 보복으로 왜병이 판곡리를 침입하였을 때, 이 못에 부녀자들이 투신 자살 하였으므로 이 때부터 낙화담이라 불리워졌다.이 못의 처음 크기는 1600여 평이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전답과 대지로 줄어들어 현재는 150평 정도의 적은 연못인데 못 가운데에 작은 동산을 만들고 그 동산 위에 수 백년 묵은 노송이 한 그루 서 있어 옛 이야기를 간직한 듯 하다. 노송 곁에 노산 이 은상이 지은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시에 쓰기를임진년 풍운 속에 눈부신 의사모습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났네절사곡 피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있으리설악산 높은 봉이 본 데로 이르는 말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었다고오늘은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교통안내 상주→화동 좌석버스. 보은→화서면 직행,시내버스수시. 찾아가는 길 · 상주→화동면 어산재정상하차→ 판곡저수지방향.· 보은→화서면 지산리 → 판곡저수지방향
    관리자   2009-09-08 06:37:48
  • 관광지명 : 상주서보주 소 : 경상북도 상주시 남장동
    옛 상산, 여기 상주 앞들의 젖줄이요 풍요의 근원인 서보에 조상의 애환이 서린 서보가를 새겨 선인의 숨결과 얼을 고이 기리고자 상맥인의 뜻으로 이 노랫돌을 세운다. 상주시에서 서쪽으로 4km 국도를 따라 가노라면 서보 다리가 나온다. 다리 입구에 커다란 돌비가 세워져 있으니 우리 선인들의 애환 어린 서보 노랫돌비다. 1977년 12월 15일 상주의 봉사단체인 상맥회에서 세었으며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여 노래를 음미해보게 한다.상주는 예로부터 곡창지대다. 특히 관계 시설이 발달된 곳이기도 하다. 서보도 그 유형의 하나이니 한발 극복의 예지를 우리 상주지방의 선인들이 보여준 보기의 하나라 하겠다. 상주 서보의 유래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상주시 낙양동 개운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하천의 제방 둑에 상주 서보 낙양수문비가 있다. 이 비의 뒷면에 서보의 연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옛부터 수리의 편리를 주는 보가 없어 몽리자들이 애타게 생각하던 중 숙종 27년에 고을 원인 이시필이 처음으로 서보를 수축하였다. 이 때가 1701년(숙종 27년)이다. 80여 년 뒤인 1783년(정조 7년)에 서필수가 개축하고 박 래설, 이기도 등이 서로 번갈아 개수했다. 박 정준 등이 관리할 때 수원지의 암거 및 수문 입구의 대 개수가 있었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매년 내리는 장마에 의하여 보가 허무러져 관계에 막대한 지장이 있으므로 그때 그때 몽리자들의 출자로 임시 보수 조치하였으나 장구한 대책을 수립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1927년에 면에 협력을 얻어 박정열 등 8명이 주동이 되어 관계조합을 조직하고 공사비를 몽리 지주에게 분담시켜 크게 보수하고 보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이와 같이 서보의 시발은 280여 년 전에 수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서보의 근원지는 상주시 남장동 입구의 냇바닥의 땅속 도랑(암거)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여기에선 물이 솟아올라 상주 앞들의 목을 추겨주었던 것이다. 인가 면적 230ha 에 176.2ha 의 논밭에 물을 대어 준다. 근원지에서 상주 앞들까지의 물줄기는 20여 리에 걸쳐 있다고 볼 수 있다. 삼 백의 고장 상주, 쌀 생산지로 이름나 있는 상주는 이 서보가 젖줄 구실을 하여 오늘의 풍요를 이루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보가를 음미하면서 내일의 풍요를 구가할 꿈에 부풀어야겠다. 교통안내 상주→내서,화령,보은 방면 시내버스. 찾아가는 길 시내에서 보은방향 1 ㎞ 정도.
    관리자   2009-09-08 06:35:59
  • 관광지명 : 오송폭포주 소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상주시에서 괴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속리산 국립공원 구역내에 있다. 오송(五松) 폭포는 속리산 신선대에서 발원한 계류가 빚은 높이 15m의 아름다운 폭포다. 보기에 따라 5단 또는 7단의 층을 타고 물줄기가 구르지만, 비 온 뒤에는 층이 구별되지 않을 만큼 장쾌한 자태를 과시한다.이 일대의 계곡을 시어동(侍御洞)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세조가 찾았을 때 칡넝쿨이 하늘로 치솟아 왕의 행차가 편하도록 모셨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이곳은 문장대로 오르는 가장 짧은 등산 코스의 기점이기도 하다. 천연림과 기이한 암석 사이를 흐르는 이 폭포는 가뭄 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또한 이 일대는 옥양폭포, 장각폭포 등이 있다. 교통안내 좌석 버스: 상주에서 화북행 시외버스 이용 08:05(첫차)-18:05(막차) 7회운행, 90분 소요.동서울터미널→청주 →화양동→ 화북 1일8회.문경,점촌→ 농암 → 화북면 문장대 방면. 찾아가는 길 문장대 등산코스 길목에위치.  
    관리자   2009-09-08 06:34:08
  • 관광지명 : 장각폭포주 소 : 경북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천황봉에서 길게 뻗어 내려온 산과 물이 한 용소로 깊숙이 떨어지니 이것이 바로 장각동구의 장각폭포다. 폭포의 높이는 6m가 넘으며 수량이 많아 산천을 진동하고 수십 장 애안아래 검푸른 용소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낙수의 여파로 빙글빙글 돌고있는 수면을 보고 있으면 금방 용이라도 치솟아 오를 것 같은 느낌을 준다.폭포 위에는 금란정과 노송이 고색 창연하게 서 있다. 폭포 좌우의 절벽과 단애의 절기는 조화가 무궁하며 조금 밑에 향북정이 있어 산, 폭포, 정자 모두가 잘 조화되어 있다.- 2002년 MBC " 태양인 이제마 "촬영지.  
    관리자   2009-09-08 06:32:45
  • 담당부서 : 관광진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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