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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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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애원

존애원
기본정보
기본정보 - 주소, 전화번호 등 기본정보
주 소 상주시 청리면 율리1길 5
문화재요약

지 정 :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9호(1993.2.25 지정)

문화재소개

존애원(存愛院)은 사설의국으로서 임진왜란 뒤의 질병퇴치를 자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뜻을 같이 한 김각(金覺) 성람, 이전, 이준(李埈), 강응철(姜應哲), 김광두(金光斗), 정경세(鄭經世) 등의 상산 선비들이 존심애물(存心愛物)의 숭고한 사랑을 실천하려는 뜻에서 1599년(선조 32년)탄생하였다. 이 해는 상주에 두 계가 있었던 것을 기해낙사계로 합사(合社)한 해로 13개 문중의 계원은 24명이었는데 합계한 자리는 존애당(存愛堂)이었다.

이로써 보면 존애원(存愛院)창설은 1599년이요 건물완성은 1602년이라 보아야 한다 존애원(存愛院)은 미증유의 전화를 입고 질병 앞에 무방비 상태였던 상주민의 고통을 스스로 덜어주기 위해 자생적으로 탄생한 사설의료국(私設醫療局)인 점에서 그 정신도 높이 살 일이지만 그 유래도 전국에서는 희귀하다 하겠다.

존애원은 의료활동만 한 의국이 아니라 낙사계의 회합 자리가 되어 각종의 행사도 치렀는데 특히 1607년 이후부터 갑오경장(1894년)에 이르기까지 경로잔치였던 백수회(白首會)를 개최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1607년의 존애원백수회(存愛院白首會)때는 송량(宋亮) 김각(金覺) 정이홍(鄭而弘) 윤전(尹塡) 등의 어른을 정경세, 이준, 김지복, 김지덕 등의 자질이 모시었다.

낙사계는 1797년(정조 21년)왕으로부터 대계란 칭송을 받고 1906년 한광(韓匡)이 아들의 관례(冠禮)할 때 존애원에서 <대계백수회>를 가진 바도 있다 한마다로 존애원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던 상주 선비들의 박애정신에서 탄생한 사설의료국이었음과 동시에 향토사랑을 실천한 낙사계원들의 모임터였다고 하겠다.

존애원 유래
넓은 약뱅이 들 한구석 낮은 언덕 아래 아담한 자태로 서 있는 존애원... 청리면 율리에 위치한 이 건물은 화려하지도 장식적이지도 않지만, 자연 속에 묻혀 있는 자체로의 편안함은 보는 사람을 여유롭게 만듭니다.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이곳에 담겨있는 우리 선조들의 정신만큼은 그 무엇보다 크고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임진왜란의 전화를 입고 질병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상주 민초들의 아픔을 스스로 덜어주기 위해 자생적으로 탄생한 전국 최초의 사설 의료국입니다. 김각(金覺), 성람(成?), 이전(李?), 이준(李埈), 정경세(鄭經世), 강응철(康應哲), 김광두(金光斗) 등의 선비들이 "존심애물(存心愛物)"의 숭고한 사랑을 실천하려는 뜻에서 1599년 창설한 것입니다. 존애원이라는 명칭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남을 돕게 된다는 송나라 선비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의 말을 따서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는 의료 활동 뿐 만이 아니라 낙사계의 회합자리가 되어 각종 행사도 치렀는데, 특히 1607년 이후부터 갑오경장(1894)에 이르기까지 경로잔치였던 백수회(白首會)를 개최한 것은 특기할 만 합니다. 1607년 존애원 백수회때는 송량(宋亮), 김각(金覺), 정이홍(鄭而弘), 윤전(尹塡) 등이 모시었습니다. 낙사계는 1797년(正祖 21년) 왕으로부터 ‘大契’란 칭송을 받았고 1906년에는 한광(韓匡)이 아들의 관례(冠禮) 때 존애원에서 “大契白首會”를 가진 바도 있습니다.
이처럼 존애원은 민초들의 애환과 질곡을 헤아리며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던 상주 선비들의 박애정신에서 탄생한 의료시설인 동시에 향토사랑을 실천한 낙사계원들의 모임터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둘씩 사라져만가는 우리의 문화유산 가운데 꿋꿋히 그 터를 지키며 서 있는 존애원... 영원히 지켜나가야 할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 담당부서 : 문화예술과
  • 담당자 : 전지숙
  • 연락처 : 054-537-7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