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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상주

조선시대 지방통치의 전성기를 맞다

상주목은 경상감사의 본영本營이자 영남대로嶺南大路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도로 교통이 발달하였습니다. 유곡역과 낙동역 등의 역원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낙동강과 강창江倉을 연결하면서 그 역할이 부각되었습니다. 경상도 『도선생안道先生案』과 상주목 『목선생안牧先生案』, 상주 향리의 삶이 담긴 『연조귀감掾曹龜鑑』을 통해 당대 지방통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국난극복과 임진왜란

국난극복과 임진왜란

1592년(선조25) 4월 25일 상주 북천에서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이끄는 중앙군은 왜의 선발부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1592년 11월 23일 정기룡 장군은 의병들과 힘을 모아 상주성을 탈환하였습니다. 1602년(선조35)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쟁으로 인한 질병과 가난을 해결하고자 여러 문중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전국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인 존애원存愛院을 설립합니다.

상주의 종가

상주의 종가

상주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늘 책을 가까이하며 유학의 바탕인 효제충서孝悌忠恕를 실천하고자 배우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학문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만나 한층 깊어졌고,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학문으로 이름 높인 학자가 많이 나오면서, 상주 학맥學脈을 이루었습니다. 상주의 대표적인 종가들은 이렇게 학문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습니다.

상주의 교육

상주의 교육

조선시대 상주에서의 교육은 서당書堂, 향교鄕校,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서원과 향교는 유교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이 컸습니다. 서당은 1542년(중종37) 당시 상주목사로 부임한 신잠(申潛)에 의해 관내 17개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서원은 임진왜란 이후 건립되기 시작하였고 상주 유학자들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학파를 중심으로 한 사학기관으로 성현의 위폐를 모시고 유학의 교육기관으로 기능하면서 상주 향촌사회의 유교문화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