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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의역사

선사시대

  • 상주지역은 구석기 이래로 사람들이 생활하였음이 최근 신상리 구석기 유적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신상리 구석기 유적의 존재는 영남내륙에서 확인된 가장 오랜 유적으로 상주지역이 구석기 이래로 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생활하였음을 방증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 상주지역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유적은 지석묘, 입석 그리고 주거지역이다. 지석묘는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그릉 사면이나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소하천변에 위치한 평지가 야산과 연결되는 구릉 사면에 군집을 이루어 위치한다. 현재 상주시 헌신동, 부원동, 중덕동 등 약 10개소 이상의 유적이 알려져 있다. 지석묘는 대체로 5~10기가 하나의 군집을 이루어 위치하며, 이들 가운데 정식으로 발굴조사된 것으로는 청리 지방공단조성사업 사전조사에서 조사된 15기가 있다.
  • 청리유적에서 조사된 15기는 경사면 위쪽과 아래쪽 2개 군(群)으로 나뉘어져 소규모 군집을 형성하고 있다. 축조 형태는 지석묘의 상석(上石)이 하부 석관(석곽)의 뚜껑 역할을 하는 개석식(蓋石式)이다.
  • 유물은 석검(石劍), 석촉(石鏃) 등 석기류와 홍도 등 토기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 그리고 입석은 상주시 부원동, 중덕동, 헌신동 등에 다수 분포하는데, 지석묘군과 유사한 분포를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밖에 상주시 남적동, 낙동면 구잠리, 사벌국면 금혼리 등 여러 곳의 무문토기와 석기 산포지가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는 상주에 사벌국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및 열전에 의하면 신라 점해왕(247~261)때에 신라에 속해 있던 사벌국이 태도를 바꾸어 백제에 귀부 하였고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강화 했으나 왕은 듣지 아니하므로 석우로 장군을 보내어 정복했다고 적혀있어 사벌국은 백제와 신라의 영토확장에 눌려 서기 249년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B.C 1세기경 함창지역에 고령가야국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 신라 점해왕 때에 신라에 병합된 사벌국은 법흥왕 12년(525년)에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여 이등(伊登)을 군주로 삼았다. 신라는 지방구획을 5州로 나누고 지방장관을 군주라 했다. 이때부터 신라에 편입되어 5개州의 하나가 되었다.
  • 전국 5州 설치 현황
    • 上州(상주)
    • 下州(창영)
    • 한산주(경주)
    • 실직주(삼척)
    • 비래홀주(안변)
  • 진흥왕 13년(552년)에 군사조직으로 5州에 6정(停)을 두어 상주정(尙州停)에 1개 군단(軍團)을 설치하였다.
  • 진덕여왕 2년(648년)에 김유신장군을 상주행군 총관(摠管)으로 임명하여 신라가 백제와의 싸움에 전방기지로 활용하는 등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 태종 무열왕(660년)이 김유신, 품일, 흠춘의 군사를 백제정벌에 출전시키는 등 금돌성(今突城)에 37일간 머물다가 백제의자왕의 항복 보고를 받고 부여 소부리성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 백제 정벌의 전진기지 역할
  • 문무왕 13년(673년) 상주정을 귀당(貴幢)으로 승격개편하여 삼국통일 이후도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 신라의 군사편제는 정(停)과 당(幢)으로 조직되었는데 이것은 군영(軍營) 군단(軍團) 부대(部隊) 등에 해당되었고. 대당(大幢)은 수도인 경주부근에 귀당(貴幢)은 지방의 중요한 군관구(軍管區)에 두었다.

통일신라시대

  • 신문왕 5년(685년) 지방행정을 개편하면서 전국을 9州 5小京으로 편성하였는데 상주는 9州에 속 하여 주치소(州治所)가 설치되었다.
  • 9州 현황
    • 尙州(상주)
    • 良州(양산)
    • 康州(진주)
    • 熊州(공주)
    • 全州(전주)
    • 武州(광주광역시)
    • 韓州(경기도 광주
    • 朔州(춘천)
    • 溟州(강릉)
  • 신문왕 7년(687년)에 상주성을 축조하였다. 성곽규모는 王山을 중심으로 쌓은 석축(石築)으로 둘레 1,549철, 높이 9척이며, 東門을 공락문(控洛門), 西門을 읍로문(挹露門), 南門을 홍치구루(弘治舊樓), 北門을 현무문(玄武門)이라 하였으며, 성안에 태평루(太平樓) 사령청(司令廳) 상산관(商山館) 등 22개 공공기관과 21개 우물(井), 2개 연못(池) 등이 소재하였다고 각종 자료에 남아 있다.
  • 경덕왕 16년(757년)에 사벌주를 오늘날의 尙州로 개칭하고 혜공왕 12년(776년)에 1州 10郡 30縣을 관할하였다. 상주에 소속된 郡縣은 오늘날 낙동강 상류지역인 안동시 임하면 일대를 경계로 서 쪽으로는 영주시 일부, 청송군 일부, 예천군, 문경시, 의성군, 군위군, 김천시 일부, 충북의 청원·보은·옥천·영동· 황간 일대가 관할에 속하였다.
  • 주(州)의 長官 명칭은 종래의 군주에서 총관, 도독(都督) 등으로 개칭되었는데 오늘날의 道에 해당되었고 郡에 太守, 縣에 令을 두어 중앙관리가 배치 되었다. 신라의 지방제도는 행정적 의의와 함께 군사적인 의의도 매우 중요시 되었다.
  • 진성여왕 6년(889년) 정치문란으로 각지방의 호족세력과 농민의 봉기가 있었는데 상주에는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폭동이 있었다. 이것은 신라몰락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북원의 양길과 궁예, 견훤등의 후삼국 형태로 발전하였다.
  • 성(城)은 여러 종류의 명칭으로 구분할 수있는데 먼저, 지리적으로 구분하면 산성(山城), 평지성(平地城) 등으로 나눌 수 있고 형태적으로 보면, 만월성(滿月城), 반월성(半月城), 장성(長成) 등으로 나누며 재료를 중심으로, 토성(土城), 석성(石城), 목책(木柵)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구릉지등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읍성(邑城)을 이용하였지만, 전투시에는 주로 산성을 이용하였다. 산성은 대개 도시중심지역 부근의 험준한 산위에 방어벽을 쌓아 병기·군량·연료 등을 저장하거나 사람의 주거 및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우물 등을 확보해야 한다. 견훤산성은 자연암반과 계곡을 이용하여 산 정상부분에 4각형으로 쌓았는데 건물터와 우물형태 등이 남아있다. 산성에 올라서면 속리산 문장대 및 관음봉 일대와 청화산·도장산 등 사방을 관망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
  • 효공왕 8년(904년)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가 상주를 침입하여 30여 성(城)을 취했으며, 경명왕 2 년(918년) 병풍산성에 웅거하던 견훤의 아버지이자 상주의 유력한 호족인 아자개(阿慈蓋)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견훤의 본성은 이씨인데 후에 견씨(甄氏)라 하였다(삼국사기)
  • 왕건즉위 18년(935년)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왕건에게 의지했고 양주(양산)을 식읍으로 받았다.

고려시대

  • 성종 14년(995년) 오늘날의 도제(道制)를 최초 실시하여 전국을 10道로 나누고 중앙 집권체제를 확립하여 지방장관인 절도사(節度使)를 파견하였다. 상주는 영남도(嶺南道)라 하여 오늘날의 경상도 12주 48현을 관할하는 절도사가 위치하였다.
  • 이때 경주는 영동도(嶺東道)라 하여 경남지역 9주 35현, 진주는 산남도(山南道)라 하여 역시 경남지역 10주 37현을 소관하였다.
  • 전국 10道 영역현황
    • 관내도(關內道 : 경기 · 황해도)
    • 중원도(中原道 : 충청북도)
    • 하남도(河南道 : 충청남도
    • 강남도(江南道 : 전라북도)
    • 영남도(嶺南道 : 경상도 일부)
    • 영동도(嶺東道 : 경상남도 일부)
    • 산남도(山南道 : 경상남도 일부)
    • 해양도(海陽道 : 전라남도)
    • 삭방도(朔方道 : 강원 · 함경남도 일부)
    • 패서도(浿西道 : 평안도)

    ⇒ 오늘날 경상도 지역을 일명 영남지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千年前 영남도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 현종 3년(1012년) 상주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설치하여 경주와 진주를 관할하였고 同 5년(1014년)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경주로 옮기고 안무사(安撫使)를 설치하였다.
  • 고려시대 왕명 및 공문서 전달, 지방관 및 관원의 파견, 특수물자 수송 등을 위하여 전국에 525개소의 역참(驛站)을 정비하였고 중요 간선도로를 주요지명을 따서 22道로 나누었다. 이중에 상주를 거쳐가는 尙州道의 속역(屬驛)은 유곡(문경), 낙동(상주), 철파 · 안계(의성), 지보(용궁), 송제(임하), 문거(청송) 등 25역이 있었고 경산부도(京山府道)는 낙산(상주), 김천, 안림(고령), 회동(영동) 등 25역이 있었다.
    • 역참 : 역말을 갈아타는 곳으로 오늘날의 우정(郵政) 또는 숙박업소 등의 역할을 하였다.
  • 현종 9년(1018년)에 전국을 5道·兩界·4都護·8牧制로 정비하였는데, 이 제도는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이 때부터 상주는 목사(牧使)가 설치되었고 상주목(尙州牧)은 관내 7郡 18懸 2知事府를 지휘 · 감독하는 계수관(界首官)이었다.
  • 당시 상주목 관할은 문경 · 용궁 · 개령 · 보령 · 함창 · 영동 · 해평군(의성 · 군위 등 17현)의 7개 군과 안동부의 임하 · 예안 · 의흥군(봉화등 10현)을 비롯한 경산부의 고령군(대구 · 칠곡등 10현)이 소속되었다.
  • 전국 8牧 현황
    • 상주(尙州)
    • 광주(廣州)
    • 청주(淸州)
    • 충주(忠州)
    • 진주(晋州)
    • 전주(全州)
    • 나주(羅州)
    • 황주(黃州)
  • 지방장관인 절도사는 지방관리의 행정을 사찰하고 승진과 면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고, 후에 안찰사, 안렴사, 도관찰출척사등 여러명칭으로 바뀌었다.
  • 고려 고종 41년(1254년) 몽고군의 6차 침입시 몽고장수 차라대(車羅大)가 충주산성·상주산성을 공격 하였으나, 상주산성은 은척 황령사 승 홍지(洪之)의 반격으로 과반수를 잃고 남쪽으로 물러 갔다.
  • 충숙왕 원년(1314년)에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慶尙道)로 개칭한 이후 조선조(朝鮮朝)에서도 그대로 시행되어 오늘에 이러고 있다. 오늘날의 경상도 명칭은 이 때 탄생하였다.

조선시대

  • 경상도 감영(監營)이 고려말에는 경주에 있었으나 태조 원년(1392년)에는 상주목(尙州牧)에 설치하였고, 태종 8년(1408년) 8월까지 4명의 경상감사가 상주목사를 겸 하였다.
    • ※목사(牧使)는 대개 행정구역 명칭이 州로 되어 있는 곳에 설치되었다. 직급은 정3품이지만 보다 높은 품계를 가진 사람이 임명되는 경우가 있어 정2품이 임명될 경우에는 영목사(領牧使), 종2품일 경우에는 판목사(判牧使)라 하였다.
    • 지방수령중 가장 품계가 높은 것은 종2품의 부윤으로 관찰사와 격이 같았으며, 관찰사가 부윤을 겸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부윤을 설치한 곳은 평양 · 함흥 · 의주 · 광주 · 경주 등이 있었다.
    • 군사적인 용도로 설치한 대도호 부사는 안동 · 강릉 · 영변 · 창원 · 영흥등에 설치하였다.
    • 지방장관인 관찰사는 종2품으로 행정 · 사법·군사권을 장악 하였고 임기 동안 관찰을 순력(巡歷) 하는 행영체제(行營體制)였으나, 조선중기 임진왜란 이후 유영체제(留營體制)로 바뀌었으며, 임기는 2년이었다. 보좌관으로 도사(都事) · 판관(判官)등이 있었다.
  • 태종 13년(1413년)에는 전국을 경기 · 충청 · 전라 · 경상 · 강원 · 황해 · 함경 · 평안도의 8道로 나누어 지방체제를 정비했다. 이 때 道 단위간의 구역조정이 있었으며, 오랫동안 상주 관할에 속하였던 청원 · 옥천 · 보은 · 영동 · 황간 일대가 충청도에 이관되었다. 조선초기의 지방제도가 고려말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지만, 태종때에 이르러 비로소 주명위주 (州名爲主)로 道名을 바꾸어 8道체계를 확립하였다. 당시 상주 관할의 경상도는 오늘날의 부산 · 대구 · 울산광역시와 경상남 · 북도를 포함한 지역으로서 전국 지방제도 중 가장 넓은 면적이었다.
  • 8道 지방체계 및 감영(監營) 설치 현황
    • 경기도(한성)
    • 강원도(원주)
    • 전라도(전주)
    • 황해도(해주)
    • 평안도(평양)
    • 함경도(함흥 또는 영흥)
    • 충청도(충주)
    • 경상도(상주)
  • 경상도가 타도(他道)에 비하여 인구가 많고 지역이 넓어 태종 7년(1407년)에 낙동강을 경계로 서쪽은 右道, 동쪽은 左道로 구분하여 右道감사는 상주목사가, 左道감사는 경주부윤을 겸한적이 있었다.
  • 조선 세조 3년(1457년) 각 道에 군사조직인 진(鎭)이 설치되어 상주목은 목사겸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두었다가 곧 진으로 환원되었다.
  • 세종 30년(1448년) 7월에서 단종 2년 7월까지 6년간 4명의 경상감사가 상주목을 겸하였고, 세조 11년 (1465년) 9월 도관찰출척사를 관찰사로 고쳐 부르게 하여 조선후기까지 이어 졌다
  • 연산군 3년(1564년) 11월 이극균(李克均)이 경상우도 지도(慶尙右道 地圖)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 중종 14년(1419년)에도 경상도 업무가 과중하다 하여 종전처럼 구분하여 우도감사(右道監司)는 상주 목사를 겸하고 좌도감사(左道監司)는 경주부윤을 겸하게 하는 등 일시적으로 2명의 감사를 두기도 하였으나 곧 환원 되었다.
  •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도로가 불통하여 左道는 경주, 右道는 상주에 감영을 설치하였 으며, 同 26년(1593년)에 다시 환원하여 星州의 칠곡현(현재의 칠곡군)에 임시 감영을 설치하고, 同 28년 (1595년)에는 다시 左·右道로 나누어 감영을 분리하였으며, 同 29년(1596년)에는 달성군에, 1599년 (선조 32∼33년)에는 안동에 임시 설치하였다가 1601년(선조 34년)에 대구로 옮겼다.
  • 1592년 11월 상주 가판관(假判官) 정기룡이 尙州城을 탈환하였다.
    • ※ 조선초기부터 중기까지 201년간 상주에 설치한 경상감영이 임진왜란 7년을 통하여 수차례 감영을 옮기는 수난을 당한 것은 1592년 4월 북상하는 왜군을 상주에서 맞닥뜨린 이일(李鎰)의 관군이 북천(北川)에서 대패(大敗)하여 상주성이 함락되고 신립(申砬)마져 충주에서 전사하여 서울에서 남쪽으로의 교통이 마비되어 제 기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상주 감영은 대구 감영이 정착되어 韓末(1894년)까지 존속하면서 그 지위를 잃었다.
  • 선조 35년(1602년) 정경세(鄭經世)등이 임란후 만연하는 질병(疾病)을 퇴치할 목적으로 청리면 율리에 민간 최초의 사설의료기관 존애원(存愛院)을 건립하였다.
  • 영조 25년(1749년) 상산지(商山誌)를 증보할 당시 상주목 관할 31懸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내동 · 내서 · 내남 · 내북 · 중북 · 중동 · 단동 · 단서 · 단남 · 단북 · 외동 · 장천 · 청동 · 청남 · 공동 · 공서 · 공남 · 모동 · 모서 · 화동 · 화서 · 화북 · 은척 · 외서 · 외북 · 영순 · 산동 · 산서 · 산남 · 산북 · 대평)
  • 고종 6년(1869년) 10월 임진난(1592년)후 폐허된 尙州城을 목사 남정학이 수축중 이임하자 1870년 후임목사 민치서가 北門등 4대문을 중수하고 1871년 목사 조병로가 계속 수축하였다.

근대

  • 1895년(고종 32년) 갑오개혁으로 8道 지방제도는 폐지되어 23府 331郡으로 개편되었다. 이것은 大지역주의에서 小지역주의로 전환된 것이며, 道이하의 府 · 牧 · 郡 · 懸을 모두 郡으로 일괄 정비하여 지방행정체계를 단일화하고 府에는 관찰사를설치하고 郡에는 郡守를 두었다. 이때 상주목은 상주군 (23面 관할)으로, 함창현은 함창군으로 되어 안동부(安東府)에 속하였다.
  •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에 의하여 전국 23府를 13道로 정비하였다. 이때 경상도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로 구분되고, 名郡은 영역의 大小에 따라 구분되어 상주·경주는 一等郡으로, 대구 · 성주 · 의성 · 안동은 二等郡, 함창은 4等郡이 되는 등 41개군이 경상북도에 소속되었다.
  • 1905년 11월 4일 상주출신 위암 장지연(張志淵)선생이 을사조약의 강제체결과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게재하여 정간처분을 당하였다.
  • 대한제국 고종 광무 9년(1905년) 전국을 8도로 개편하고 상주군은 31면에서 22면으로 개편되었다.
  • 1906년 전국은 13道 3,335面, 경상북도는 41郡 507面으로 정비되었고, 상주군은 당초 31面에서 21面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단동 · 단서 · 단남 · 단북의 4면은 비안군(比安郡: 지금의 의성군)에 영순 · 산동 · 산서 · 산남 · 산북의 5面은 문경시에 넘겨주었다.
  • 일제 강점기인 1910년 9월 30일 도의 관찰사를 장관으로 개칭하고 府에 부윤, 郡에 군수, 面에 면장을 두었다.
  • 1912년 시가지 및 도로정비 명목으로 尙州城이 훼철되고 1924년 최종 남아있던 南門마저 없어 졌다.
  • 1914년 3월 1일 지방행정구역은 12府 218郡 2,517面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함창군 7面이 3面으로 개편되어 상주군에 편입되었고, 상주군 22面은 15面으로 개편되어 상주군은 18個面으로 정비되었다.
  • 1917년 6월에는 面制가 공포되어 面에서는 교육사무를 제외한 관내의 모든 공공사무를 처리하도록 하였고, 1919년 8월에는 道의 장관을 도지사(道知事)로 개칭하고 경찰권을 행사하였다.
  • 1931년 4월 1일 읍면제(邑面制)실시로 상주面이 邑으로 승격하여 상주군은 1邑 17面을 관할하였다.

현대

  • 1945년 이후 우리지역은 정치 · 경제 · 군사 등의 중심지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산업화 및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망이 우리지역을 비켜가게 되었고, 낙동강을 이용한 水運 역시 그 역할을 철도에 넘겨주었으며, 상공업 발달에 따른 농업지역으로서 남게 된 것이 낙후의 요인이었다.
  • 1949년 7월 4일 법률 제32호로 공포되어 같은 해 8월 15일 시행된 지방자치법에 의거 지방행정조직은 특별시, 도, 시, 군, 읍,면, 리, 동으로 하였다.
  • 1966년 7월 1일 모서면 서부출장소등 5개 출장소가 설치되고,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가 문경시 가은읍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 상주읍에 중부 등 4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 1980년 12월 1일 함창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 1월 1일 상주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1989 년 1월 1일 상주군 함창읍 윤직리 일부(윤직 2리)가 점촌시에 편입되고 같은 해 4월 1일 화북면 남부출장소가 화남면으로 승격되었다.
  • 1995년 1월 1일 市·郡이 도농복합시로 통합되어 1읍 17면 7동이 되었다.
  • 1995년 7월 1일 민선1기 지방자치가 실시되었고, 1998년 7월 1일 민선2기 지방자치가 출범되었다.
  • 1998년 10월 12일 행정구역 통 · 폐합에 따라 중앙동이 동문동으로 편입되어 1읍 17면 6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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